[오늘과 내일]천광암/경제성적표 '동상이몽'

  • 입력 2004년 1월 6일 18시 18분


노무현 대통령이 3차 국정토론회에서 “실제로는 상당히 한 것 같은데 성적표를 받아 보니까 시원치 않다”고 말했다. “언론의 포위를 극복하지 않으면 올바른 평가를 얻을 수 없다”는 이야기도 했다. 노 대통령의 마음 한구석에는 정부가 하는 일의 많은 부분을 언론이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는 억울함이 깔려 있는 모양이다.

정말 채점이 잘못된 것인지, 경제 분야만 한번 되짚어 보자. 성과가 수치로 나타나는 경제는 공정성 시비가 적을 테니까.

소득분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자리는 4만개가 줄었다. 1999년 이후 매년 일자리가 35만∼86만개씩 늘어온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수십만개나 사라진 셈이다. 신용불량자 행렬에는 100만여명이 새로 합류했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당초 작년 경제성장률을 5.3%로 내다봤으나 최근 반토막인 2.7%로 낮췄다. 노 대통령은 잠재성장률을 7%로 높이겠다고 공약했지만 한국은행의 공식 통계로는 오히려 4%대로 떨어졌다. 투자와 소비는 언제 회복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침체에 빠져 있다. 지난해 말 본보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12%만 ‘경제가 안정을 이뤘다’고 응답한 게 당연해 보인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에게는 공통점이 10가지 있다고 한다. ‘계획만 잘 세운다’ ‘공부하기 전에 연필 깎고 책상 치우고 할 일이 많다’ ‘공책은 오색찬란하다’ 등등. 시급한 현안을 제쳐 놓고 장밋빛 ‘로드맵’ 그리기에 바빴던 이 정부가 닮은꼴이다.

공부 못하는 학생은 시험 발표가 나야 공부를 한다. 또 벼락치기가 통한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문제가 곪아 터진 뒤에야 나온 부동산대책과 신용카드대책이 비슷하다.

공부 못하는 학생은 시험 점수가 낮으면 “이번 시험은 좀 어려웠어” 하고 넘어간다. 청와대의 한 고위 경제참모는 어느 좌담회에서 “대내외 여건을 감안하면 올해 정부의 경제정책은 비교적 선방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던가.

비록 성적은 나쁘더라도 어디에 잘못이 있었는지 겸허하게 되돌아보는 학생에게는 희망이 있다. 현 경제팀에도 이런 기대를 함직할까.

노무현 정부는 출범 후 내놓은 335개 주요 경제정책의 추진 상황을 점검하는 회의를 지난해 12월 30일 가졌다. 41개를 완료했고 288개를 정상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단지 6개만 부진하다는 것이 이 자리에서 나온 결론이다. 6개가 부진한 이유는 대부분 국회의 입법 지연이나 이해집단의 반발 때문이라고 책임을 돌렸다. 정부의 경제정책은 100점인데 대외변수나 국회 때문에 외환위기 후 최악의 경제난이 초래됐다는 말인가. ‘완료’와 ‘정상 추진’의 결과를 언론이 포위하고 있는 탓에 국민이 느끼지 못한다는 말인가.

정부는 국민의 피부에 와 닿는 경제정책을 펴는 데 실패한 내부 원인부터 정확하게 진단해야 한다. 실기(失機)한 정책은 종 친 뒤 써낸 답이라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자체채점은 100점, 국민의 채점은 낙제점인 낯 뜨거운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천광암 논설위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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