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오명철/실미도(實尾島)

  • 입력 2004년 1월 6일 18시 23분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가 개봉 2주 만에 전국관객 370만명을 기록해 방화 사상 최단기 흥행성적을 냈다. 82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돼 제작단계부터 화제를 모으기는 했지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인 ‘반지의 제왕’과 겨루며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제작 당시 평소 친분이 있는 강 감독에게 “요즘 관객들이 냉전시대의 일을 기억하고 싶겠느냐”며 회의를 표명했던 필자로서는 쑥스러운 노릇이기도 하다.

▷놀라운 것은 평소 영화를 잘 보지 않던 40, 50대 관객이 적지 않고, 젊은 여성들이 눈물을 떨어뜨리며 극장을 나선다는 사실이다. 고된 훈련을 이겨내는 과정과 뜨거운 전우애, 자폭으로 삶을 마감하는 라스트 신 등을 감동적으로 버무려 낸 연출의 힘일 것이다. 한 여대생은 “나라가 버린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목청을 높였고, 어느 여중 3학년생은 “정말 70년대 우리나라에 저런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다.

▷영화 ‘실미도’는 중앙정보부가 1968년 ‘청와대를 까러 온’ 북의 124군부대에 대한 보복으로 ‘김일성의 목을 따오기 위해’ 결성한 공군 684부대의 실화를 토대로 한 작품. ‘갈 데까지 간’ 인생들인 부대원 31명은 실미도에서 살인병기가 되지만 한반도 정세의 변화로 3년여 만에 용도 폐기된다. 끝까지 살아남은 24명은 71년 8월 23일 기간병을 사살하고 버스를 탈취한 뒤 억울함을 하소연하기 위해 청와대로 가던 중 서울 대방동에서 최후를 맞는다. 당시 중학생이던 필자는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현장을 목격했지만 진실을 알 리 없었다. ‘공비(共匪)’로까지 매도됐던 그들은 1993년 4월호 ‘신동아’를 통해 비로소 그 실체가 알려진다.

▷강 감독은 ‘1000만 관객’과 일본에서의 성공을 기대한다고 한다. 실미도에서 희생된 영령들이 도와준다면 불가능한 수치도 아닐 것이다. 현대사에서 남달리 큰 고난과 갈등을 겪었던 한국은 ‘실미도 사건’ 외에도 영화화할 소재들이 많다. 의식 있는 감독과 역량 있는 배우들이 있는 한 억울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영령들은 반드시 재평가될 것이다. 감독과 배우 스태프의 노고를 치하하며 삼가 ‘684부대원’들의 명복을 빈다.

오명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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