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익칼럼]소통의 접점을 찾자

  • 입력 2004년 1월 14일 18시 27분


내가 올 정월 초하룻날에 읽은 책은 베리 닐 카우프먼이란 미국인이 자신의 열일곱 달 된 아들이 자폐아임을 알게 된 뒤 이 불치의 정신장애아를 치료해 완전한 성인으로 키우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아들 일어나다(최영희 옮김, 열린 간)’이다. 이 책을 내게 보내준 번역자는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 세상을 뜬 친구 황인철 변호사의 부인으로 큰아들이 자폐아다.

▼눈맞춤으로 자폐아 치료한 부모 ▼

나는 처음엔 역자의 노력에 대한 예의로 이 책을 펼쳤지만 자신과 외부를 철저히 차단하고 있던 자폐아가 차츰차츰 외부로 눈을 틔워 가는 과정에 대한 추리소설적 흥미와 자식에 대한 부모의 감동적인 애정에 젖어들면서 망외의 깨우침을 얻었다.

그 원인도, 그래서 그 치료법도 확실히 밝혀진 바 없는 소아정신장애인 자폐증은 바깥세계나 타인에 대한 소통을 거부하고 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는 특이한 증상을 갖는다. 소아정신병원의 치료 방법에 회의를 느끼고 그들 스스로 아이를 치료하기로 작정한 카우프먼 부부는 자폐아 아들에게 금지와 꾸지람을 주어야 한다는 전문의들의 지침과 방식을 거슬러 자기들 나름의 방법을 개발한다.

그들은 아기가 접시를 돌리면 함께 돌리고 소리를 지르면 함께 지르고 물건을 던지면 함께 던지는 방법으로 아기와 함께했다. 거기에는 물론 아기에 대한 세심한 애정과 아기를 독자적인 인간으로 대하는 경의가 담겨 있었다.

그러기를 몇 주, 전혀 눈길을 주지 않던 아기가 문득 엄마와 아빠를 빤히 바라보며 눈을 맞췄다. 이 작은 말미에 희망의 실마리를 붙든 부모는 더욱 열성적으로 아기와의 교감을 찾았다. 아기의 잦아진 그 눈맞춤을 차츰 외부 세계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깨우침으로 발전시켰으며, 2년 뒤에는 마침내 단어를 배우고 말을 하게 만드는 데까지 성공했다. 그 아기는 정상인으로 성장해 명문대에서 공부하며 부모의 자폐아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다.

내가 여기서 주목했던 것은 아기와 엄마의 눈맞춤이다. 아기는 의식과 무의식에서 외부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었고 엄마는 그 아기의 수준으로 자신의 의식 무의식을 낮추고 동화시킴으로써 완강한 장벽의 틈새로 한 줄기 빛을 비추었던 것이다. 그 둘 사이의 접점이 서로가 통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고 그 길을 통해 차단의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접점이 자폐아와의 소통 회로를 열어주었고 거기서 세계와 인간에 대한 아이의 개방적 인식이 자라게 되었다.

나는 우리 사회가 이익사회로 옮겨왔다는 진단을 했지만 그 이익사회는 집단간의 소통을 거부하고 자신의 이기적인 주장과 사고에만 집착하는 일종의 자폐적 성향을 가진 부정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이익만 눈앞의 목표로 설정되어 있지 너와 내가 함께 누릴 수 있는 이익, 너와 나를 뛰어넘는 공동체적 이익에 대한 고려는 거의 하지 않고 있기에 오늘의 우리가 이처럼 혼란스럽고, 홉스의 말처럼 만인이 만인에 대해 이리가 되는 상태에 빠졌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집단과 집단, 지역과 지역, 세대와 세대, 나와 너 사이에는 처지와 생각을 바꾸어 배려하는 ‘역지사지’의 사유법이 개입되지 않고 있다.

▼이익사회 속 ‘공동선’ 모색을 ▼

이 대치 상태에 빠진 집단들이 소통의 회로를 열고 상대의 존재를 배려할 수 있는 접점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눈맞춤을 이루어내고 인식과 판단을 공감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그 실제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그 치료는 자폐아의 경우보다 덜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들과 부모 사이의 사랑과 경의, 예의와 공감의 자세가 우리 이익집단 사회의 악덕을 이겨내고 서로에게 상통하는 공동선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이 책은 감동적인 일화로 보여주고 있다.

김병익 문학평론가·인하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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