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문학과지성사’(이하 문지)의 대표를 지낸 김병익씨의 자서전이다. 그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장을 지냈으며, 문지를 창립하고 2000년에 퇴임한 후 현재 상임고문으로 있다. 다수의 평론집과 산문집, 번역서를 냈으며 대한민국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 같은 건조한 이력을 걷어 내고 읽어 보면 이 책에는 때로 고독했을지라도 외롭지는 않았던 한 사내의 삶이 보인다. 삶의 마디마디 깊이 있는 성찰을 놓치지 않았던 한 지식인의 기록인 이 책은 ‘스스로를 향한 단상’이라는 부제답게 삶의 내면을 활짝 열어 보이는 담담하고 생생한 고백록이다. 날카로운 비평가의 글이라기보다는 감수성 예민한 시인의 글이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광복을 맞았고, 6학년 때 6·25전쟁을 겪었으며, 전후의 궁핍한 시절에 사춘기를 보냈고, 실존주의와 기독교 사상을 토대로 삼았던 대학 4학년 때 4·19를 겪었다. 그는 격변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교회를 버리고 담배를 피우다가 애연가가 되며, 허무의 심연에 빠지면서 탐미주의에 젖어 든다. 술 못 먹고 잡기(雜技)라곤 바둑밖에 모르는 모범생인 그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런 날들을 지나오면서 청년 김병익은 강해졌고, 그것이 험난한 세파를 이겨내는 힘이 되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인간 김병익씨의 상징 코드로 떠오르는 것은 ‘겸손’과 ‘균형’이다.
그것은 자신이 집안의 막내로, 그것도 눈에 덜 띄고 조용한 막내로 자라 얼뜨고 수줍은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슨 거창한 이유를 댈 법도 한데 역시 그다운 고백이다.
그가 쓴 ‘되풀이-생각하기’ 대목은 남을 인정하지 않는 분열과 갈등만이 팽배한 이 시대에 잠언으로 여겨질 만큼 울림이 크다.
‘나는 내 것이 아닌 것, 내가 편들지 않는 것에 대한 이해를 가지려 했고 내가 가진 것, 내 편인 것에 대해 지나치게 기울지 않도록 애썼다. (중략) 내가 이편에 있다는 점으로 저편에 있는 것을 부인해서는 안 되며 내가 이편에 있음을 인식하면서 이편에 있음의 한계도 분명히 의식해야 했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스스로 보수주의자로 자처하면서도 진보주의의 입장을 긍정하게 했고, 1960년대이면서도 1980년대나 1990년대의 의식과 감수성을 이해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소설가 고종석(한국일보 편집위원)은 “이 책을 읽는 것은 역사의 가파른 도전에 마주 선 한 세대의 다부진 지적 응전이 어떤 빛깔과 결의, 시대정신으로 피어나고 여물었는지를 살피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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