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중현/경제학자들의 '분노'

  • 입력 2004년 1월 19일 19시 02분


“행동하는 지성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충언(忠言)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보다 적극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19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 대학교수 411명이 서명한 ‘이제는 경제’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대표로 읽어 내려가는 서강대 경제학부 김병주(金秉柱) 교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한국 경제학계의 원로’인 노(老)학자의 음성에서는 우리 경제를 위기상황으로 몰아가는 정부와 정치권 등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가 묻어 있었다.

기자회견장에 참석한 다른 교수들의 표정도 비슷했다. 이들은 “교수의 본분은 연구하고 강의하는 것이지만 제자들이 사회에 나가 취업을 할 수 없는 현실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미국에는 경제정책 방향에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 경제학자들이 나서는 전통이 있다. 지난해 2월에도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를 비롯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10명 등 학자 400명이 “부시 정부의 세금삭감안은 재정적자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며 단기 부양책으로도 문제가 있다”는 성명을 냈다.

한국 사회에서 ‘시국선언’이라는 말의 뿌리는 깊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불의가 팽배한 현실을 고발하며 나선 학계와 종교계의 시국선언을 많은 사람들은 기억한다.

그러나 ‘경제의 총체적 위기’를 경고한 한국 지성(知性)들의 대규모 시국선언은 이번이 처음으로 기록될 것 같다. 이날 사회를 맡은 성신여대 경제학과 강석훈(姜錫勳) 교수는 “지난 목요일 서명을 시작했다”며 “방학 중이고 주말이 끼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411명이라는 숫자는 놀라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학자들이 느끼는 ‘위기감’의 정도를 알 수 있다.

경제 및 경영학자들은 합리성을 존중한다. 또 대체로 ‘행동’보다는 ‘사색’을 선호한다. 이번 시국선언에 참여한 학자 가운데 평소 ‘나서기를 좋아하는 지식인’은 많지 않다.

우리 사회와 경제에 켜진 ‘빨간 불’이 어느 정도 위험수위이기에 ‘조용한 경제학자’들을 화나게 하고 행동에 나서게 했을까. 정부와 정치권은 진지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박중현 경제부기자 sanjuc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