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앰허스트대학의 윌리엄 타우브만은 흐루시초프의 전기(傳記)에서 “그는 참으로 불가해(不可解)한 인물이었다”고 썼다.
흐루시초프는 전후(戰後) 냉전체제를 주도했다. 베를린장벽을 구축하고 쿠바 미사일 위기를 야기했다. 동유럽의 반소(反蘇) 민주화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최초로 동서(東西) 평화공존을 제시했으며 재래식 병력을 일방적으로 감축했다. 수백만명의 정치범을 석방한 것도 그였다.
그는 스탈린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스탈린이 가장 신뢰한 ‘졸개’였다. 최측근 정치참모였다. 그럼에도 그는 크렘린을 장악하자마자 스탈린을 겨냥한다.
그것은 단지 정적(政敵)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나. 아니면 고르바초프의 말대로 ‘역사의 과오를 응시한 위대한 자기고백’이었나. “그것은 고귀한 인간성의 한 수수께끼였다.”(타우브만)
1956년 소련공산당 20차 전당대회. 그는 마침내 칼을 빼들었다. 스탈린의 권력욕과 포악함을 경계했던 레닌의 유서를 읽어 내리며 ‘역사의 범죄자’ 스탈린의 죄상을 낱낱이 파헤친다.
흐루시초프의 용기는 흔치않은 것이었다. 그의 스탈린 격하는 수구파가 여전히 당을 장악하고 있던 때에 행해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목을 만져봐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착한 레닌, 나쁜 스탈린’이라는 흐루시초프의 등식(等式)은 한계가 명백했다. 그는 스탈린의 전체주의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뿌리에 닿아있음을 보지 못했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는 어정쩡한 지점에 있었다.
그의 외교정책이 헷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동서 해빙시대를 열었지만 그 바탕에는 ‘사회주의 체제가 우월하며 자본주의를 매장해 버릴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깔려 있었다.
그는 공산주의의 개혁을 의도했다. 몰락(沒落)을 원하지 않았다. 그의 ‘정신적인 제자’ 고르바초프가 그랬던 것처럼.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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