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 2월17일. 브루노는 여기서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장작불에 타 죽었다. ‘꽃의 들판’에서 산화(散花)했다.
교회는 여러 차례 타협을 시도했다. 감옥생활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브루노였지만 그는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국가든 교회든 독단을 강요할 수는 없다.”
마침내 이단심문소에서 판결문이 낭독되었을 때 그는 심문관들에게 외쳤다. “그 판결을 통과시키는 당신들의 두려움은 그 판결을 받아들이는 나의 두려움보다 더 크리라….”
르네상스의 대표적 사상가 조르다노 브루노.
바야흐로 중세는 그 두꺼운 각질을 깨고 신(新)사고가 새순처럼 돋아나고 있을 때였다. 시대는 르네상스의 세찬 물살을 타고 근대의 빛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역사적 항해의 동력(動力)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조심스러웠다. ‘땅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천동설은 중세 교회의 거역할 수 없는 도그마였고 신앙의 절대 조항이었다.
그래서 그는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이런 야릇한 설명을 했다. “하느님이 만든 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우주 한가운데에 촛불(태양)을 켜 놓는 것이 옳지, 궁색하게 촛불을 신전 안에서 빙글빙글 돌도록 해놓았을 리가 있느냐.”
그는 운이 좋았다. 책이 나오자마자 숨을 거뒀으니 이단심문소에 소환될 일도, 목숨을 구걸할 일도 없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사정이 달랐다. 70세의 노학자는 살아남기 위해 학자의 양심을 저버려야 했다. “나는 성실한 마음과 거짓 없는 신앙심으로 (지동설의) 잘못과 이단을 포기하고 저주하며 싫어함을 맹세하는 바입니다.”
그런 그가 법정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읊조렸다고? 글쎄….
“갈릴레이는 ‘지식’을 가졌고 브루노는 ‘신앙’을 가졌다. 갈릴레이의 앎은 본인이 부인(否認)을 해도 훼손되지 않는 과학적 발견이었으나, 브루노의 앎은 부인하면 훼손되는 종교적 진리였다.”(야스퍼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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