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문학상들은 대부분 장편에 주어진다는 점에서 주로 단편에 시상하는 국내와는 사뭇 다르다. 미국의 최고 권위라 할 ‘퓰리처상 픽션 부문’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2000년 수상작은 예외였다. 서른세 살의 인도계 미국 여성 줌파 라히리의 단편집 ‘축복 받은 집’에 상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작가의 데뷔 작품집이며, 수상자가 턱없이 젊다는 점도 이례적이었다.
이 단편집 속의 '잠시동안의 일'은 미묘한 감정의 굴곡을 겪는 젊은 지식인 부부가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콱 막힌 듯한 체험을 겪고 헤어지는 모습을, 불시에 찾아온 정전사태에 빗댄 수준작이었다. 이후 작가에게는 ‘다음 작품은 그만한 수준의 장편이 돼야 한다’는 부담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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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차기작인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은 미국에서 지난해 9월 출간돼 국내에서 최근 번역됐다. 전작의 안정된 구성, 섬세한 장면 직조방식이 유지되고 있다. 긴 시간을 예인해 나가는 ‘이야기의 동력(動力)’도 무난하게 살아 있다.
라히리는 이전 작품들처럼 이번에도 잘 배운 인도계 미국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주인공 ‘고골리’는 예일대 출신 건축가. 소설의 원제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자기 이름을 삼은 사람’이란 뜻의 ‘The namesake’인데 작중 고골리는 바로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리에서 따온 것이다.
고골리의 아버지 아쇼크는 미국 메사추세츠공과대(MIT)에 유학하기 위해 인도를 떠나기 전 야간기차 전복 사고를 겪고 잔해에 깔린 적이 있다. 하지만 손에 쥔 고골리 단편집이 구조대의 눈에 띄어 살게 되고 아들도 얻었던 것이다. 고골리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사람들이 도대체 자기 이름을 듣고는 인도인인지, 미국인인지 구분조차 못하는 현실이 씁쓰름하다.
이는 라히리 자신의 현실이면서, 다인종 갈등의 교차로인 미국에 사는 ‘WASP 아닌 자’들의 현실이다. WASP는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의 조건을 갖춘 미국 주류다. 고골리는 결국 ‘모든 것을 아우르는 사람’이란 뜻을 가진 인도 말 ‘니킬’로 이름을 바꾸고, 세련된 가문의 WASP 여성과 사귀지만 자아를 잃어 간다는 느낌만 강해진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작가 고골리의 영향력을 기리는 마음에서 “우리는 모두 고골리의 ‘외투’에서 나왔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기차 전복 직전 ‘외투’를 읽고 있었던 아쇼크에게는 “내 생명은 ‘외투’에서 나왔다”는 의미이지만, 아들 고골리에게는 “고골리라는 이름이야말로 당장 벗어던지고 싶은 ‘외투’”임을 강조하는 것만 같다.
이 작품은 코미디도 비극도 아니며 삶 그 자체가 들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늘 자기가 누구인지 자문하면서 미국에서 살아가야 하는 서른일곱 살 인도계 여성의 눈에 비친 삶이다. 비범한 성찰이나 지적인 박학함으로 불타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점묘화를 연상시키는 차분하고 섬세한 묘사와 삶의 아름다움이 엿보인다.
출간 후 미국에서 20만부가 팔렸고, 늘 대중문학이 패권을 쥐는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픽션 부문(하드커버)에서 15위까지 오르며 선전했다. 이번 주는 35위.
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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