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오명철/白衣從軍

  • 입력 2004년 2월 23일 19시 19분


대한민국 정치인들이 의미를 크게 잘못 알고 있는 말이 두 가지 있다. ‘마음을 비웠다’와 ‘백의종군’이다. 지난 30여년 동안 대통령병을 앓아 온 거물 정치인들이 자신의 기득권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면서 정적과 국민을 향해 ‘마음을 비웠다’는 소리를 남발해 왔고, 경선결과에 불복 또는 자진사퇴하거나 부정부패에 연루된 국회의원들이 잠시 2선으로 물러서면서도 ‘백의종군’을 입에 담는다.

▷이순신 장군은 생애 2번의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장군이 43세로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직에 있으면서 변방인 두만강 녹둔도(鹿屯島)에서 근무할 무렵이었다. 가을에 느닷없이 여진족이 침입해 군사를 살해하고 60여명을 납치해 가자 장군은 즉각 뒤를 쫓아 구출해 왔다. 하지만 조정은 장군의 책임을 물어 장형(杖刑)과 함께 ‘옷을 벗겼다’. 그해 겨울에야 장군은 큰 공을 세워 복직할 수 있었다. 1860년 청나라와 러시아의 베이징조약 체결로 러시아 땅이 된 녹둔도에는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장군의 전승 비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1597년 장군은 원균의 시기와 모함으로 한양으로 압송돼 삭탈관직을 당해 두 번째 백의종군하게 된다.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장군은 남을 끌어들이거나 헐뜯지 않았다. 임금은 결국 장군을 죽일 죄목을 찾지 못해 석방한다. 무보직 상태로 남해안의 병영으로 가던 장군은 도중에 모친의 부고를 전해 듣고 피를 토하듯 통곡한다. 원균의 패전과 전사로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한 장군은 전함과 군사들을 수습해 명량에서 대승리를 거둔다. 이듬해 장군은 노량에서 일본 수군에 최후의 타격을 가해 적을 궤멸시킨 뒤 전사한다.

▷최근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의 백의종군 선언을 보면서 슬그머니 걱정이 됐다. 백의종군은 ‘나의 억울한 처지에 대해 남을 탓하지 않고, 싸움에서는 반드시 승리하며, 승전의 과실은 내가 챙기지 않을 때’에만 비로소 그 진정한 의미가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울적한 심사에 세종로 네거리로 나가 백의종군의 원조인 이순신 장군 동상을 바라다봤다. 장군께서도 시류에 편승한 동상 이전과 자신의 가장 중요한 어록이 왜곡 남발되는 작금의 정치 현실이 안타까우신 눈치였다.

오명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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