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이진우/봄빛 가득한 세상을 기다리며…

  • 입력 2004년 2월 23일 19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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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홍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가까운 동산에 올라 보니 붉디붉은 동백이 지천으로 피었더군요. 짙은 초록 동백잎은 오후의 따가운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눈부셨습니다. 은빛 바다 위 섬들은 구름을 휘감은 산맥의 봉우리들처럼 첩첩이 떠 있었습니다. 아주 멀리 보이는 섬은 하늘에 걸어 놓은 액자 같기도 하였습니다. 바다와 맞닿은 하늘도 은빛. 어느 게 바다이고 섬이고 하늘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봄은 불쑥 찾아왔습니다. 느긋한 햇볕에 볼은 따가웠고 해초 냄새와 함께 실려 온 바닷바람도 훈훈하고 부드러웠습니다. 게으른 이 사람도 몸이 근질근질해졌고요. 어수선한 집을 손보느라 잠깐 몸을 움직였는데, 금방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습니다. 땀이 나는데도 왜 그리 신이 나던지요. 맨발에 고무신 신고 밭을 둘러보러 갔습니다. 지난가을 늦게 씨 뿌려 못 자란 배추들과 막 꽃대를 올리며 키재기를 하고 있는 청경채. 아직 꽃이 피지도 않았는데 뿔나비 한 마리 날아다녔고요. 그 곁에 쑥이 제법 올라와 있었습니다. 쑥을 뜯어 향을 맡으며 올해는 밭에 무얼 심을까, 즐거운 고민에 빠졌습니다.

도시에 살 때도 봄이 좋았습니다. 들로, 산으로, 또 바다로 달려가고 싶었지요. 그러나 왜 그런 충동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몇 년 시골 사람 흉내를 내며 살다 보니 대충 알 것도 같습니다.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 화분에 꽃 하나 키워 보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봄만 되면 씨앗처럼 땅을 파고 들어가 앉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온몸에서 움이 터 오르고, 싹이 돋고, 꽃이 필 것만 같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의 전생이 식물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대책 없이 낚싯대를 메고 바다로 나가고 싶고, 바다로 뛰어들고 싶어지는 걸 보면 바다 생물이 아니었나도 싶습니다. 종일 산을 헤매고 싶고, 다람쥐처럼 어디든 기어오르고 싶어지는 걸 보면 산짐승이 아니었나도 싶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아주 먼 조상에서부터 농사꾼으로, 고기잡이로, 사냥꾼으로 살아 온 기억이 아직 핏속에 진하게 남아 있는 탓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너른 땅에서 허리 부러져라 일하는 이웃이 보기엔 이 사람의 이야기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렇게 일할 만한 땅덩이도 없는 사람이니 너그럽게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저 텃밭이나 가꾸는 일이지만 씨 뿌리고 거두는 일을 참 좋아하고, 그 일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일 뿐입니다.

어김없이 봄이 왔고, 온 땅과 온 물의 생명들이 분주해졌습니다. 이들은 낮지만 질긴 생명의 소리로 죽어 있는 것들, 죽어 가는 것들의 이름을 자꾸만 불러댑니다. 죽음과 생명이 하나로 어울려야 비로소 봄이 활짝 피어난다는 걸 알기 때문이겠지요. 모쪼록 올해도 천하가 태평한 봄, 행복한 봄빛 가득하기 바랍니다.

이진우 시인·소설가

:약력:

△1965년 경남 통영 출생 △고려대 철학과 졸 △198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슬픈 바퀴벌레 일가’, ‘내 마음의 오후’ △산문집 ‘저구마을 아침편지’ △장편소설 ‘오감도’ ‘적들의 사회’ ‘메멘토모리’ △시 전문사이트 ‘시인학교’(www.poetschool.net) 발행인 △4년 전 온 가족이 경남 거제도 저구마을로 옮아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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