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이혼전야'…정물화처럼 그려진 사랑 그리고 운명

  • 입력 2004년 2월 27일 17시 38분


◇이혼전야/산도르 마라이 지음 강혜경 옮김/268쪽 9000원 솔

산도르 마라이(1900∼1989)는 헝가리에서 태어나, 젊어서 문명(文名)을 얻었으나 이탈리아 미국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작가다.

그는 떠돌아다니는 와중에도 아내 사랑이 지극했다. 미국 망명 시절 아내가 먼저 숨을 거두자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그녀와 완전히 하나다. (…) 그녀는 마치 독립된 개체가 아닌 것 같다. (…) 그녀는 아름답다. 사멸의 아름다움은 청춘의 도도한 아름다움이나 완벽한 여성미보다 때때로 더 설득력 있다.”

인물 관계만을 놓고 보면 이번 작품은 사랑과 죽음을 다룬 통속소설 같은 얼개를 갖췄다. 외면적으로는 단란하기 그지없는 가정을 꾸리고 있는 의사 그라이너와 아름답고 품위 있는 아내 파체카스, 그라이너의 동창이면서 파체카스와도 네 차례 만난 바 있는 판사 쾨뫼베스가 주요인물이다.

쾨뫼베스는 어느 날 재판 기록을 살펴보다가 다음 날 그라이너 부부의 이혼 사건을 다루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당혹스러워 하고 있는 그에게 불시에 그라이너가 찾아와 “아내가 숨졌으니 내일 재판은 열리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 온다.

하루 사이에 벌어진 일로서, 긴 세월에 걸친 세 사람 사이의 사랑을 다뤘다는 점에서 그의 또 다른 작품 ‘열정’을 떠올리게 한다.

우연과 운명, 사랑과 사멸 같은 존재론적인 주제에 대한 성찰은 마라이 문학을 관류하는 힘이자 아름다움이다. ‘이혼전야’ 역시 정물화처럼 선명하게 그려진 이야기 속에 이 같은 문체미학이 단아하면서도 열정적인 빛을 뿜어내고 있다.

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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