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7년 ‘평화의 댐’ 착공

  • 입력 2004년 2월 27일 18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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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 산 321의 4. 예전엔 뱃길로나 가 볼 수 있던 오지(奧地)였다. 물에선 천연기념물인 황쏘가리와 어름치가 지천으로 흔하고, 숲에선 노루와 산양이 한가로이 노닐었다.

뫼와 골이 ‘머흐러(험해)’ 구름도 쉬어간다는 이곳엔 지금 거대한 인공구조물이 들어서 있다. 평화의 댐이다. 6·25전쟁의 애상(哀想)을 담은 가곡 ‘비목(碑木)’을 낳았던 화천의 또 하나의 명물이다.

1986년 10월 30일 ‘5공’의 이규효 건설부 장관은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북한이 200억t의 담수용량을 가진 금강산댐을 건설하고 있으며, 댐이 무너지면 63빌딩 중턱까지 물이 차오르게 될 것이다.” 여론이 들끓었다.

그런데 발표시점이 묘했다. 그 이틀 전에는 전국 26개 대학 1500명의 학생들이 건국대에서 ‘애국학생투쟁연합’을 결성했고, 그 다음 날에는 경찰이 헬기를 동원해 학생 전원을 연행했다.

시국은 몹시 뒤숭숭했다. 전국에 직선제 개헌 열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1987년 2월 마침내 북한의 수공(水攻)에 맞선 대응댐인 평화의 댐이 착공된다.

그러나 북한의 금강산댐 공사가 지연되면서 ‘수공(水攻) 조작설’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전문가들은 금강산 해발 190m 위치에 높이 215m의 수력댐을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댐 양편에 물막이를 해야 할 산보다 댐 높이가 25m나 높아진다는 것.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감사원 감사를 통해 북한의 금강산댐 위협이 터무니없이 부풀려졌다고 발표했다.

평화의 댐은 민주화의 거센 파고(波高)를 피해 갈 ‘5공의 방주’였던가.

그리고 평화의 댐은 까맣게 잊혀졌다 2002년 4월 말 망령처럼 되살아난다. 미국 인공위성 사진을 통해 댐 상부에 함몰 흔적이 발견돼 금강산댐 붕괴 가능성이 다시 제기됐다. 정부는 증축공사를 벌이기로 했으나 이번에는 환경단체의 거센 반대에 부닥쳐야 했다.

정작 화천 주민들은 답답하다. 그들에게 평화의 댐은 폭우 때마다 홍수를 보듬어준 고마운 존재였다.

“평화의 댐이 어떻게 태어났든, 이제는 댐을 있는 그대로 볼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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