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그의 이름을 딴 ‘루슨트테크놀로지 벨연구소’ 로비에는 그가 유언처럼 남긴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의 말대로 발명은 ‘샛길’을 여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역사는 1등만을 기억한다(?).
그러나 벨의 성공은 단지 그의 특허 출원이 경쟁자보다 한 두 시간 빨라서가 아니었다. 또 벨이 전화기를 처음 발명한 것도 아니었다. 독일의 필립 라이스는 벨보다 십수년 앞서 전화기를 선보였고, 벨과 거의 동시에 특허를 냈던 엘리셔 그레이의 전화기는 훨씬 성능이 뛰어났다.
그런데도 왜 벨인가.
그레이는 자신이 만든 이 19세기의 위대한 발명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그는 ‘늘 다니던 길’에 익숙했다.
사실 전화기가 처음 발명됐을 때 사람들은 그 효용을 알기 어려웠다. 자동차가 아직 ‘신기한 장난감’이던 시절, 생활 반경은 주변에 국한돼 있었고 ‘원거리 통화’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오죽하면 러더퍼드 헤이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을까. “(전화기는) 놀라운 발명품이요. 하지만 세상에 누가 이렇게 쓸 데 없는 물건을 사용하겠소?”
그러나 벨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발명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다 주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느냐에 의미를 두었다. 그는 ‘돈에 걸신 난’ 발명왕 에디슨과는 달랐다.
벨은 가슴이 따뜻한 남자였다. 보스턴 농아학교에서 발성법을 지도하던 벨은 청각장애인들이 어떻게든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염원했다.
그는 앞 못 보는 농아였던 헬렌 켈러와도 아름다운 우정을 남기고 있다.
그녀는 여섯 살 때 농아학교 교수로 있던 벨을 만나 그의 무릎에서 시계를 만지며 놀았다고 한다. 그녀는 자서전 ‘내 삶의 이야기’를 그에게 헌사했다. “농아들에게 말을 가르치고 대서양에서 로키산맥까지 말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게 해주신 분께.”
1922년 8월 2일. 미국의 전화시스템은 1분간 침묵을 지켰다. 벨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였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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