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의식을 규정한다. ‘1984년’ 속의 신어(Newspeak)는 현실을 거꾸로 믿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유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다. 자유 평등 등에 속하는 모든 어휘가 ‘죄사상(crimethink)’ 한마디로 통합됨으로써 자유 평등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어진다는 거다. 언어의 정치적 통제가 소설 속에서만 행해지는 건 아니다. 물건 값 인상 대신 쓰이는 ‘가격 현실화’, 대량살상무기를 뜻하는 ‘빅보이’‘리틀보이’ 역시 현실을 호도하는 일종의 신어다.
▷‘1984년’에선 있는 말을 없앰으로써 생각마저 없애려 했지만 우리 시장경제 현실에선 상품명을 길게 함으로써 안하던 생각까지 굳이 하게끔 만드는 전략이 유행이다. 한때 ‘바나나우유’로 충분했던 상품명이 요즘엔 ‘우유 속 진짜 바나나과즙 듬뿍’ 정도는 돼야 실감이 난다. ‘들기름을 발라 더욱 고소한 재래김’ ‘햇살담은 조림간장’ 등 상품 특성에 유머 감각까지 가미한, 이름 자체가 광고인 제품이 쏟아져 나온다.
▷상품명이 길면 외우기는 어려워도 신뢰감을 주는 효과가 있다. 아무리 간장에 햇살이야 담겼을까마는 우유에 가짜 바나나과즙을 넣거나 김에 재봉틀기름을 바르지는 않으리라고 믿는 게 보통사람 심리다. 열린우리당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명칭을 ‘깨끗한 선거위원회’(약칭 깨선위)라고 한 것도 이런 심리를 꿰뚫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깨끗한 선거를 치르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는 열린우리당의 설명이다. 이름만 본다면 1월 말 현재 선거관리위원회가 적발한 선거법 위반 사례 가운데 이 당이 가장 많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이름과 실체가 부합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일이겠지만.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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