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치환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 메서
작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그 자리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 시집 ‘旗빨’(정음사) 중에서
까만 교복, 빛나는 모표, 새 가방을 들고 봄물보다 더 설레는 마음으로 줄달음치던 시오리 길, 중학교 신입생 시절. 국어책 속에 실려 있던 이 시는 얼마나 내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던가. 나는 아직도 이보다 아름다운 봄소식을 알지 못한다.
‘꽃등인 양 피어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도 눈부시지만, 시인이란 대저 어떤 사람이기에 ‘작은 멧새 하나’가 ‘적막한 겨우내 작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던’ 것을 염려하며,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는’ 꽃가지의 떨림을 저 홀로 지켜본단 말인가?
내 가슴에 시의 꽃등이 켜졌다. 떨리는 가슴으로 단숨에 전문을 외고 또 외웠다. 그것만으로 부족해서 며칠 새 1, 2, 3학년 국어책에 나오는 모든 시를 암기하게끔 만들었으니, 오늘날 걷는 시인의 길은 단연 이 ‘봄소식(春信)’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시의 매력은 봄의 광휘로움에만 있지 않다.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꽃그늘의 길도 저토록 멀고 외롭거늘 멧새여, 삶이여, 나는 또 어디서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다’ 가는 것이냐.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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