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숫자 줄이기’ 급급한 신용불량대책

  • 입력 2004년 3월 10일 18시 52분


정부가 10일 발표한 신용불량자대책은 과거 대책보다 진일보했다. 하지만 경기가 좋아질 때까지 시간을 벌자는 미봉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신용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한 근본대책은 더욱 아니다. 특히 원리금 삭감방침은 도덕적 해이를 조장할 우려가 높다. 대책을 설익은 상태에서 서둘러 발표한 이유도 석연치 않다.

이번 대책은 연체채무의 상환을 유예하거나 만기를 연장하는 데 주안을 두고 있다. 빚 상환 능력과 의지에 대한 엄밀하고 공정한 심사가 이뤄진다면 선의의 신용불량자를 상당수 구제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심사가 난맥상을 보일 경우엔 문제 해결을 오히려 지연시키고, 도덕적 해이를 확산시켜 신용사회의 근간을 무너뜨릴 소지가 많다.

따라서 정부는 개인워크아웃 등을 통해 올해 안에 신용불량자를 70만명 줄이겠다는 식의 숫자목표를 앞세워서는 안 된다. 정부가 숫자에 매달려 금융기관을 무리하게 다그치면 심사가 요식행위로 변질되기 쉽고, 결국 금융의 기본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빚 상환노력을 유도하기 위한 유인책으로 원리금을 일부 삭감해 주는 것은 더 위험하다. 이는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기 위해 성실히 빚을 갚은 일반 채무자들에게 상대적 불이익을 안기고, 원리금 삭감 혜택을 받지 못한 신용불량자들에게 빚 안 갚고 버티겠다는 집단심리를 조장할 가능성이 높다.

신용불량자 문제를 근본적으로 풀기 위해 무엇보다 절실한 대책은 잠재신용불량자가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것을 예방하고 불합리한 신용불량자 등록제도를 개선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이에 관한 실효성 있는 방안은 제시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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