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황제의 신임을 잃은 ‘철혈(鐵血)재상’은 무력했다.
그는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빌헬름 2세는 녹록지 않았다. 선대(先代)보다 명민했고 야심이 있었다. 사사건건 황제와 충돌하던 그는 마침내 ‘내각 총사퇴’의 승부수를 띄웠으나 무위에 그치자 황제의 사임요구를 받아들인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그는 나폴레옹이 몰락하던 1815년에 태어났다. ‘유럽의 19세기는 나폴레옹과 함께 떠올랐고 비스마르크와 함께 저물었다.’
그는 독일 근세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았다. 6년 동안 3번의 전쟁을 치르면서 덴마크(1864년) 오스트리아(1866년) 프랑스(1871년)를 차례로 통일 독일제국의 제물로 삼았다. 통일 후 그가 구축한 유럽동맹체제는 비할 데 없이 교묘하게 서로를 반목시켰고 그 와중에서 독일은 ‘평화’의 이득을 취하였다.
그의 주변이 항시 적과 동지로 나뉘었듯 그에 대한 평가도 극으로 갈린다.
자유주의자들은 그를 ‘나치 등장’의 전조로 지목한다. 독일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파시즘을 경험해야 했던 파행과 굴절의 이면에는 독일제국의 권위주의 전통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 “히틀러라는 악(惡)은 비스마르크에서 비롯된다.”
비스마르크는 정치를 이념이 아닌 힘의 논리로 파악했다. “큰 문제는 연설이나 다수결이 아니라 철(鐵)과 피(血)를 통해서 결정된다.”
나폴레옹이 전쟁의 책략가라면 그는 정치의 책략가였다.
정치는 ‘가능성의 미학’이었고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그는 나폴레옹과 같은 정치적 도박꾼이 아니었다. 전쟁이든 정치적 모험이든 단 한번의 승부에 국가와 자신의 미래를 걸지 않았다. 절제를 알았고 한계를 알았다.
“우리는 역사를 만들어낼 수 없다.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릴 뿐이다. 어찌 등(燈)을 밝혀 과일을 익히려 드는가.”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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