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누가 걸어간다’…그와 通한 그녀, 왜 그를 버렸나

  • 입력 2004년 3월 19일 19시 09분


◇누가 걸어간다/윤대녕 지음/326쪽 8800원 문학동네

작가 윤대녕씨가 1994년 첫 창작집 ‘은어낚시통신’으로 큰 관심을 모은 지 만 10년 만에 열 번째의 소설 단행본인 ‘누가 걸어간다’를 펴냈다.

여섯 편의 중단편이 실린 이번 창작집에는 네 편의 작품이 연애소설 범주에 들어간다. 그중 ‘흑백텔레비전 꺼짐’ ‘무더운 밤의 사라짐’은 ‘남자에게 먼저 접근해 온 여자가 갑작스레 달아나 버린’ 상황을 다루고 있다. 윤씨가 자주 다루는 이야기 전개 방식이다. 미스터리 느낌을 주지만 상대 남자의 충격이 심하지 않은 탓에 그다지 드라마틱하지는 않다.

‘흑백텔레비전 꺼짐’에서 정계 거물의 비서관은 정치적 희생양이 되는 운명을 피해 내려간 제주도에서 이벤트 도우미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둘은 급기야 결혼하기로 약속하는데 정작 결혼 당일 여자는 필리핀 휴양지로 달아나 버린다. 남자는 왜 그녀가 달아나야 했는지를 여자의 이복언니가 전해준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알게 된다.

‘무더운 밤의 사라짐’은 ‘그녀’와 ‘나’ 사이의 이야기다. 직장 동료였던 두 사람은 ‘밤 호텔’이라는 러브호텔에서 몇 차례 사랑의 밤을 보냈는데 ‘그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남자에게서 달아나고 만다. 훗날 그녀와 나는 우연히 재회하는데 그녀는 ‘나’와 동침할 때 ‘느꼈던’ 낯선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달아났다고 털어놓는다. 그 남자는 그녀의 육감만이 직시할 수 있는 존재, 바로 그 호텔에서 자살했던 이의 혼령이다.

두 작품은 살까지 섞은 여자에게서 난데없이 버림받은 남자가 ‘인간과 인간이 통(通)한다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소외감과 자각을 갖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통한다’는 것의 한계성은 또 다른 작품 ‘올빼미와의 대화’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 ‘나’라는 남자는 우연히 통화하게 된 이른바 ‘올빼미 사내’와 거의 빗나간 대화를 나누며 끝내 그와 만나지도 못한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통’하고 싶은 ‘나’의 바람과 노력은 다소 모호하고 답답한 느낌을 준다.

권기태기자 kkt@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