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아 플라스(오른쪽)와 남편 테드 휴즈의 단란했던 한때. 휴즈는 두 사람이 별거한 뒤 플라스가 자살하자 페미니스트와 플라스 숭배자들의 맹렬한 비난의 표적이 됐다. 사진제공 문예출판사
미국 시인 실비아 플라스(1932∼1963)는 명문 스미스여대 수석 장학생으로 맞은 꽃다운 스무 살 때부터 사실상의 이혼녀로 자살한 서른한 살 무렵까지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집안까지 얼어붙게 만들 것 같은 한파가 찾아온 1963년 2월. 그는 옆방에서 잠든 두 아이를 위해 빵과 우유를 차려놓고 문틈을 밀봉한 채, 가스 오븐에 머리를 들이밀고 불을 켰다. 자살 이유는 훗날 영국 계관시인으로 ‘등극’했던 남편 테드 휴즈와 넉달 전 별거에 들어간 뒤 생긴 우울증과 극심한 가난 때문이었다.
플라스의 묘비명에는 ‘휴즈’라는 성(姓)이 새겨졌지만 분노한 플라스의 숭배자들에 의해 몇 번이고 지워지고, 새로 새겨지기를 반복했다. 바람을 피운 데다 가난 속에 나앉은 플라스의 처지에 냉담했다는 점 때문에 휴즈는 평생 ‘살인자’의 낙인이 찍힌 채 살아가야 했다. 더욱이 ‘바람의 상대자’였던 두 번째 부인마저 딸과 함께 동반 자살함으로써 그는 페미니스트들의 영원한 표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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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즈는 ‘연쇄 참화의 원인 제공자’ 혹은 ‘오해와 불운의 당사자’로서 자신을 위해 한마디의 변명도 하려 들지 않았다. 대신 오랫동안 보관해 왔던 플라스의 일기를 1986년 돌연히 책으로 펴냈다. 바로 이번에 번역된 책이 그것이다.
이 일기는 플라스가 1950년 대학에 입학한 뒤부터 숨지기 전까지의 삶을 기록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에게 비범한 문학적 기량이 있어 일기를 썼다면 아마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질투와 허영 같은 자기감정에 충실한 글이다. 삶에 대한 투지만큼 패배에 대한 불안과 낙담도 큰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비범한 문학성으로 불멸에 가 닿고자 하지만 범속하고 치사한 욕망 앞에 안달하기도 한다.
이 책에 따르면 플라스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에 유학 중이던 56년 한 문예지의 창간 파티에서 휴즈를 만나 첫눈에 반했다. 휴즈가 애무를 하면서 헤어밴드를 낚아채자 그녀는 휴즈의 뺨을 물어뜯을 만큼 격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플라스는 휴즈와 결혼한 후 아이가 잠든 오전 4시에 일어나 시와 소설을 썼다. 일기 곳곳에는 안이해지려는 자신에 대한 질책과 문학사에 있어 불멸의 존재가 되려는 야망이 가득 차 있다. 그녀는 휴즈의 문학적 우월성을 인정하고 기꺼이 그의 에이전트가 되어 도와주지만, 어느 결엔가 그를 시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결국 플라스는 결혼이 파국을 맞은 후에야 절창(絶唱)들을 쏟아내는데 한 달에 무려 30편 이상을 썼다. 영미문학사의 빛나는 정점 하나를 기록한 유고시집 ‘에어리얼’은 이렇게 탄생했다. 당시 그녀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제 안에는 굉장한 자질이 있어요. 저는 제 생애 최고의 시들을 쓰고 있어요. 이 시들로 저는 유명해질 거예요….”
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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