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결코 맥아더의 허세가 아니었다. 전시(戰時)에 사령관직에서 전격 해임된 그가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해임에 대한 반대여론이 얼마나 드셌던지 트루먼 대통령의 정치생명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6·25전쟁의 첫 해는 ‘맥아더의 전쟁’이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으로 불리한 전세를 단숨에 뒤집었다. 트루먼은 그를 신뢰했고 그는 본국으로부터 어떠한 지시나 간섭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맥아더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중국의 참전과 1951년 1·4후퇴를 고비로 전황은 급변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두 사람은 부딪치기 시작했다. 미국은 ‘명예로운 휴전’을 모색했고 맥아더는 줄기차게 확전을 요구했다.
그는 만주에 원자폭탄 투하를 주장하며 26개의 원폭을 요구했다. 그것도 1차로!
1951년 3월 24일. 끝내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트루먼에게 반기를 들었다. 트루먼이 중국에 휴전을 제의하기 직전 그는 ‘북진(北進)명령’을 내린다. 대통령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그해 4월 11일 해임된다.
그는 영웅이었나. ‘불가사의하고 모순에 가득 찼던’ 맥아더. 그는 국제정세에 어두운 냉전시대의 군인이었을 뿐이다. 미 정보기관이 수차례 북한의 남침 징후를 경고했으나 무시했다. 중국의 참전 가능성도 묵살했다.
그는 우리의 은인인가. 한강다리를 끊어버리고 혼자 도망쳤던 이승만에게는 그랬다. 그는 서울이 수복되자 맥아더의 손을 덥석 잡으며 “우리 민족의 구세주”라고 감읍했다. ‘맥아더의 신화’는 그렇게 시작됐다.
노병은 죽지 않았다. 그리고 사라지지도 않았다. 1957년 인천에 맥아더 동상이 건립됐고, 어느덧 47년을 버티고 있다.
어느 시인이 애통해하듯 ‘남의 나라 장수의 동상이 서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한지 어쩐지는 모르겠다. 다만 우리 역사에서 그게 그리 낯선 풍경만은 아니다.
당나라의 소정방을 불러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방정사’라는 절 이름을 그에게 헌사했다든지, 조선이 임진왜란 때 명군을 지휘했던 이여송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든지….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