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매체의 현상학을 논하는 책 ‘피상성 예찬’에서 저자인 빌렘 플루서는 문자 시대에서 이미지 시대로의 변화 속에 인간이 마주치는 새로운 소외에 주목한다. 컴퓨터에 의해 합성된 ‘디지털 쥐’가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가족영화 ‘스튜어트 리틀’. 동아일보 자료사진
마셜 맥루한과 더불어 대표적 ‘디지털 사상가’로 추앙받고 있는 빌렘 플루서(1920∼1991)는 미디어와 테크놀로지에 의한 문화의 패러다임 교체를 필생의 연구 과제로 삼았던 체코 프라하 출신의 커뮤니케이션 철학자다. 그는 뉴 테크놀로지 시대에 미디어의 변혁으로 나타나는 이른바 커뮤니케이션 혁명을 일종의 ‘그림의 혁명’으로 보는 관점에서 인류의 문화사를 통찰하고 디지털 혁명을 논의한다.
플루서는 인류의 문화사가 선사에서 역사로, 이어서 탈(脫)역사로 진행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다시 말해 그의 사유는 인간의 문화가 ‘마술적’ 그림의 시대에서 선형(線形)의 텍스트 시대로, 이어서 점들로 이뤄진 기술적 그림의 시대로 넘어온 과정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 책은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에 대한 그의 독자적 시각으로 디지털 매체의 현상학을 논한다. 플루서는 오늘날 디지털 인간이 생겨나기까지의 과정을 자연에 대한 인간의 반자연적 행위의 과정으로 인식한다. 그 결과 이제는 문자시대에서 이미지의 세계로 넘어오면서 그 변한 세계를 따라오지 못하는 인간이 겪는 가치의 위기와 새로운 차원의 소외에 주목한다.
인간은 이런 새로운 세계 속에서 방향을 잡기 위해 ‘기구(器具)’를 이용하지만, 플루서는 바로 이 ‘기구’에 의해 오히려 인간이 지배당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의 가치판단과 일상의 삶 전체가 우리를 프로그램화하는 기구들에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처럼 우리를 프로그램화하는 전체주의적 기구 문화를 비판하며, 그것을 제압하는 힘으로 ‘기술적 상상력’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런 상상력의 촉발을 위해 컴퓨터 화면 같은 기술적 그림의 표면, 즉 점의 집합과 분산으로 이뤄지는 영상의 ‘피상성’을 예찬한다. 기술적 상상력으로 이 기구들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구 프로그램에 대처할 수 있는 인간의 창의적 능력을 확신하면서 대화의 방식으로 다시 이 기구를 프로그램화하는 미래사회를 상상한다. 그렇게 해서 상호 능동적인 대화 망에 의해 직접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차원의 생활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타인을 인정하고 타인을 통한 자기 인식이 가능한 ‘대화적인’ 텔레마틱 사회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플루서가 제안한 이런 새로운 인간상, 새로운 세계상의 구상은 상호주관적인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그 모든 구상의 기반이 되는 것은 새로운 그림인 기술적 형상이다. 이런 디지털 가상의 세계에서 현실 개념 또한 바뀌어 사물의 원본과 시뮬라크르(simulacre·복제)의 구분 내지는 현실과 허구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게 된다. 인간은 ‘주체에서 기획으로’ 옮겨가는 실존적 변화를 겪는다.
플루서는 문자시대의 종말, 즉 ‘역사의 종말’을 맞은 이 시대에 절망하지 않고 인간의 잠재력과 창의성을 확신하고 있다. 그는 어떤 철학적 체계를 구축하지 않고 가벼운 글쓰기를 통해 문제를 신선하게 포착하고 있다. 죽음 속에서 살아남은 망명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결코 비관적이지 않은 사유가 그의 특별한 점이다.
김현진 연세대 유럽문화정보센터 전문연구원·독문학 pleiadesh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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