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쾌걸 조로’…유약한 귀족 복면의 영웅 변신하다

  • 입력 2004년 3월 26일 17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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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걸 조로/존스턴 매컬리 지음 김정미 옮김/341쪽 9500원 황금가지

많은 사람들은 변신을 꿈꾼다. 복면이 매력적인 이유는 거기에 있다. ‘나’를 감추어 주는 것도, 복면이 되고 싶은 ‘나’를 드러내 주는 것도 복면이다. 깃발처럼 펄럭이는 망토를 더한다면 금상첨화다. 쾌걸 조로가 그렇다.

존스턴 매컬리의 소설 ‘쾌걸 조로’는 잘 읽힌다. 소설의 배경은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1800년대 초기의 캘리포니아. 스물네 살의 잘 생긴 귀족 돈 디에고가 주인공이다. 그가 망토와 복면을 두르면 순식간에 스페인 혈통 ‘여우’의 모습, 조로로 둔갑한다. 악을 징벌하며 핍박받는 공동체를 위해 말 달린다. 불합리한 법과 편견은 검은 복면과 망토 아래서 아무런 힘이 없다. 신화의 주인공이 그러했듯이 조로 역시 거침없다. 방황하지 않는다. 영웅에게는 가야 할 길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행동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대동소이한 여러 영웅보다 조로에게서 더 큰 재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지닌 또 다른 복면 때문일 것이다. 얼굴 위에 덮어씌운 검은 천을 벗겨냈을 때 드러나는 맨 얼굴. 바로 디에고의 모습이다. 창백하고 맥 빠진 그의 얼굴은 검은 천보다 더 단단한 복면이다. 검은 복면을 얼굴에서 벗겨내는 순간 조로와 디에고는 한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아, 혼돈의 시대여! 정녕 남자라면 음악과 시를 향유할 수 없단 말인가요?” 소설의 마지막까지 맥없이 한탄을 남발하는 그는 시종 여유만만하다. 조로는 정의의 이름으로 검을 휘두르면서도 열정적이고 낭만적인 로맨스까지 거머쥔다. 이것이 다수의 남성과 여성의 판타지를 만족시킨다.

“고귀한 혈통의 디에고가 저 사람(조로)의 절반만이라도 저돌적이고 대담하다면”이라고 중얼거리는 세뇨리타의 딜레마는 많은 여성을 공감케 한다.

또한 아들 디에고의 나태함과 무기력함에 대해 절망하는 돈 알레한드로 베가의 고뇌를 들어 보자. “봐라, 그자(조로)는 원칙을 가지고 있고, 그 원칙을 위해 싸운다. 그는 약한 자들을 돕고 억압하는 자들에게 앙갚음하지 않니.” 이 말을 ‘지금 이곳’에서도 전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다만 조로가 종횡무진하며 활약하던 그의 무대가 소설 내에서 희미하게 묘사된 것이 아쉽다. 1800년대 초기의 파란만장했던 캘리포니아를 독자가 더 크게 공감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쾌걸 조로는 복면의 영웅, 그 이상으로 우리에게 남으리라.

복면의 매력은 영웅에게만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아바타와 아이디(ID)로 표출되는 온라인 세계는 또 다른 여러 조로가 말 달리는 무대다. 많은 사람들은 전원을 켜고서 모니터 안에서 복면의 매력을 만끽한다. 게임을 즐기듯 능청스럽고 유쾌한 조로와 디에고처럼 말이다.

허혜란 소설가·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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