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사람들이…’ 아버지! 왜 ‘깃발’을 찾으셨나요

  • 입력 2004년 3월 26일 17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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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만에 새 시집을 낸 시인 이근배씨. 그의 시 ‘다산초당’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부질없구나, 읽어 줄 지기가 없는데 천 권의 책을 써서 무엇하랴, 붓을 꺾고 내 혼을 던져 저 사납고 캄캄한 바다의 끝에 닿게 하리라.’ 사진제공 문학세계사

19년 만에 새 시집을 낸 시인 이근배씨. 그의 시 ‘다산초당’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부질없구나, 읽어 줄 지기가 없는데 천 권의 책을 써서 무엇하랴, 붓을 꺾고 내 혼을 던져 저 사납고 캄캄한 바다의 끝에 닿게 하리라.’ 사진제공 문학세계사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이근배 지음/156쪽 7500원 문학세계사

시인 이근배씨(63)가 1985년 장편 서사시 ‘한강’ 이후 19년 만에 새 시집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를 펴냈다. 그는 1961∼64년 동아일보를 비롯해 5개 일간지 신춘문예를 휩쓰는 영예를 안으며 데뷔했다. 아이 같은 장난기와 범상치 않은 안목으로 예리하게 시어들을 배치하는가 하면, 그윽한 음악적 여운 속에 한국적 정한을 담아 내는 등 높은 기량을 보여 왔다.

이 시집 속의 풍경들은 갑년(甲年)을 넘긴 그의 삶 대부분을 담고 있다. 사상가 아버지의 월북과 아픈 가족사, 민족문화의 빛나는 본령에 대한 동경 같은 것들이다.

그 출발지점을 알리는 시는 ‘깃발’이다. 광복 전부터 감옥살이에 몸이 상한 아버지는 어느 날 어린 그에게 이상한 ‘종이 깃발’들을 가져오라는 심부름을 보낸다.

‘그 깃발의 세상이 오자/아버지는 온양으로 떠나셨고/오늘토록 돌아오시지 않는다/어머니와 우리 세 남매의/행복을 앗아간 깃발 하나/오래도록 내 안에서/입 다문 슬픔으로 펄럭이고’

‘삽다리 꽃산/어머니 누워 계시다/열여섯에 옷고름 푼/동갑내기 신랑/(…)/쉰 해 넘도록 기다리다/홀로 눈감고 선영 아래 오르셨다/(…)/삽다리 꽃산,/어때?/이 봄에 꽃피는 일 말고/우리 어머니 아버지/신방 촛불 밝혀드리는 것’(신방·新房)

고향 충남 당진군에서 어린 그를 도맡아 키운 이는 할아버지였다. 꼿꼿하고 엄격하면서도 깊이 감춰진 더운 사랑을 보여줬던 할아버지는 옛날 선비였다. 그는 바로 유도회(儒道會) 회장이었던 이각현 선생(1961년 작고)이다. 어떻게 풀어낼지 엄두도 못 냈던 가족사의 슬픔을 삭이며 시인이 매월당 김시습과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와 만해 한용운을 찾아 시를 쓴 것은 할아버지에게 정신적 젖줄을 대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천장이며 마루며 기둥에는/복제판 추사의 예서며 행서들이/격에 맞지 않게 걸려 있었다/나는 불쑥(…)/-이게 바로 포스트모던!/이라고 추사의 글씨를 가리키고’(추사 고택에 가면).

그가 이들 선비에게 다가가는 징검다리로 여기는 것은 벼루다. 좋은 벼루를 갖고 싶어 하는 그의 집착은 시집 곳곳에 거의 광적(狂的)으로 드러난다. 쉽고 아름다운 산문시 ‘하동(河童)’을 보면 압록강 기슭에서 나오는 화초석(花草石)으로 만든 벼루가 나온다. 이 벼루의 돌무늬를 잘 살펴보면 냇가의 아이들이 떠오르는데, 그의 상상세계는 슬픔에 찬 삶을 보낸 어머니에게까지 나아간다.

‘아이들이 냇가에서 벌거숭이로 모여서 놀고 있었는데요, 삼백 년쯤 전에도 이중섭이 살았던 것인지? 고추 뻗치고 오줌 싸는 놈, 발버둥 치고 앉아서 우는 놈(…)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린 날(…) 냇가에서 멱 감던 내가 그 속에 있는 것인데요, 물가에는 가지 말거라. (…) 지금도 나는 어머니 말씀 안 듣고 세상의 깊은 물 속에서 개헤엄으로 허우적거리고만 있는 것인데요.’

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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