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3월 31일. 프랑스 파리에 에펠탑이 완공됐을 때 그 완고한 ‘형체(形體)의 옷’을 벗어버린 에펠탑에서 캔버스의 자유를 노래한 화가가 있었다.
프랑스의 입체파 화가 로베르 들로네. 현대 추상화의 기점(起點)이 된 ‘오르피즘’의 창시자. 산업도시와 기계의 예찬론자였던 들로네는 에펠탑에서 시간과 공간에서 해방된 새로운 시각을 얻었다. 물(物)의 시적, 음악적 이미지다.
그는 철근으로 만들어진 에펠탑의 찬미자가 되었고, 1909년 불후의 ‘에펠탑 연작’을 남긴다.
하지만, 들로네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에펠탑 건축에 나섰을 때 파리의 예술가와 문인들은 그 천박한 이미지에 질겁했다. 중세의 고풍스러운 도시 분위기에 300m가 넘는 철골구조물이라니!
시인 베를렌은 “흉측한 에펠탑이 보기 싫다”며 파리의 뒷골목으로만 떠돌았다. “속이 빈 촛대”라고 혹평했던 소설가 모파상은 몽소공원에 세워져 있던 자신의 기념상이 에펠탑을 보지 않도록 등을 돌려 세웠다.
‘에펠탑 철거를 위한 300인 선언’이 발표되기도 했다.
계단 1652개, 높이 320.75m, 무게 7000t. 250만개의 나사못으로 1만5000여개의 금속조각을 연결시킨 ‘에펠 공법(工法)’은 욱일승천하던 근대산업문명의 완력을 과시했다. 철(鐵)문명 시대의 선포였다.
교량건축가였던 구스타브 에펠은 기중기를 이용해 불과 25개월 만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하늘을 향해 철교를 놓았다. 산업과 예술, 토목과 건축의 아스라한 접점(接點)을 찍었다.
고층건물의 새 시대를 연 에펠탑. ‘하늘의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가 그러했듯이 그것은 하늘을 넘본다. 초월에의 욕망이요, 중력(重力)에 대한 반역이다.
‘파리의 귀부인’ 에펠탑. 그것은 19세기 시대정신의 표출이었고 현대성의 상징이었다.
문명의 서치라이트였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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