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53년 장준하 사상계 창간

  • 입력 2004년 3월 31일 18시 54분


“그땐, 사상계라는 오아시스가 있고 북두칠성이 있고 소크라테스가 있었지….”

해방(解放) 이후 그 간고(艱苦)한 세월 동안 인문(人文)의 샘이었고, 시대의 좌표였고, 지성의 빛이었던 잡지 사상계.

사상계는 1970년 박정희 정권에 의해 폐간될 때까지 ‘아무리 입을 꿰매도 하고 싶은 말은 했고, 해야 할 말은 기어코 터뜨렸다’. 함석헌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고, 장준하의 ‘백지(白紙) 권두언’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잔재주를 피우며 시류에 영합하는 글쟁이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굽힐 줄 모르는 필봉(筆鋒)은 4·19혁명의 기폭제가 되었고,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 독재에 대항하는 전위가 되었다. 그 정론과 비판정신은 민주화투쟁과 통일운동의 이념적 모태(母胎)였다. 깨어있는 지식인 사회의 구심체였다.

사무실이 있던 서울 종로구 청진동 백조다방 건물 4층은 야당 정치인과 지식인들의 사랑방이었다.

1953년 4월 전쟁통에 어렵게 창간된 사상계. 잡지는 1958년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이 필화사건에 휘말리면서 발행부수가 5만부에 이르렀고 4·19혁명 때는 8만부로 치솟았다.

장준하가 없는 사상계는 생각하기 어렵다. 사상계는 그의 분신이었고 신앙이었다.

지식인 됨의 전범(典範)으로 우러름을 받았던 장준하. 혹자는 그를 ‘박정희의 천적’이라고 했으나 그는 애초부터 박정희를 경멸했다. 박정희가 일본군 중위일 때 자신은 광복군 대위였으니!

그는 ‘강제로’ 일제의 학도병에 징집됐으나 목숨을 걸고 부대를 탈출했다. 쉬저우에서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 7개월에 걸쳐 그가 남긴 ‘장정 6000리’의 족적은 백범 김구의 표현대로 ‘살아있는 한국의 혼’이었다.

그러나 장준하는 ‘해방된 조국’에서 서른일곱 번 구속되고 아홉 번 감옥에 갔다. 그리고 1975년 경기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으로 갔다. 그의 생(生)은 광복군 대위 시절 그가 쓴 시가 예언한 그대로였다.

‘내 영혼 저 노을처럼 번지리/ 겨레의 가슴마다 핏빛으로…’

하나 그 시절, ‘사상계 세대’는 행복했다. 그래도 사상계가 있어 숨을 쉴 수 있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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