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간 북한과 미국을 떠돌다 1989년 한국으로 돌아온 신상옥 최은희 부부. 그 몇 년 뒤 신상옥은 한 인터뷰에서 알 듯 모를 듯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는 북한에서 ‘영웅’ 이상이었다.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었다. 김일성 부자의 전용별장에서 지냈고 고급 벤츠를 탔다. “김일성 부자는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었다.”
그가 총장(사장)으로 있었던 ‘신필림’에는 연간 300만달러가 지원됐다. 북한의 외환사정을 감안하면 놀라운 액수다. 북한에서 20여편의 영화를 제작했고 이 가운데 ‘돌아오지 않는 밀사’ ‘탈출기’ ‘소금’ 등 7편은 직접 감독을 했다.
1978년 1월과 7월 홍콩에서 각각 납치됐던 신상옥 부부. 이들은 김정일 초청파티에서 5년 만에 재회했고, 이때부터 탈출을 계획했다고 한다.
그러면 북한에서의 활동은 단지 탈출을 위한 ‘연기’였던가.
그의 작품세계를 뜯어보자.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에 이르는 그의 작품연보는 현기증이 일 정도로 상호모순과 불연속성을 드러낸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그의 삶의 굴곡과 맞물린다. 모호(模糊)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
그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호명(呼名)’에 응해야 했다. 그 강압적인 영화사 통폐합과정에서 회사는 살아남아야 했다. 그 소산이 전형적인 국책영화 ‘쌀’이다. ‘빨간 마후라’다.
심훈의 ‘상록수’에 박정희의 근대화 정책을 덧씌운 ‘쌀’은 흥행에도 성공했고 아시아영화제에서 감독상도 받았다. 그가 북한에서 만든 ‘소금’도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최은희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지 않았던가.
신상옥. 그는 남과 북에서 공히 최고의 대우를 받으면서 마음껏 영화를 만들었다.
남북을 넘나든 신상옥 부부의 행적은 아직도 ‘흐릿한’ 그 무엇이 없지 않다. 하지만 남북관계에 관한 한 파헤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지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실은 사실(事實)이 아닐지 모른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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