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게 죽기 위해서는 사는 법을 알아야 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죽는 법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이 책의 저자인 프랑스의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1914∼84)가 삶과 죽음의 연관성을 말하기 위해 인용한 시구(詩句)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산업화된 현대를 사는 우리는 잘 살기 위해 ‘잘 죽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잘 살기 위해 택하는 방법이란 어이없게도 과로사에 이를 정도로 열심히 일하거나, 일거리가 없을 경우에는 로또를 사는 정도다.
더 유감스러운 사실은 우리가 잘 죽으려고 해도 우리는 죽음에 관해 무지를 강요당하고 있고,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죽을 것인지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의학이 발달한 오늘날 죽음은 일반적으로 전문가인 의사에 의해 판정되고, 산업사회의 일상성과 효율성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사회적으로 은폐된다. 20세기에 등장한 주요한 죽음의 형태, 곧 의학상의 죽음은 더 이상 필수불가결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일종의 실패로 인식된다. 사회로부터 철저히 격리된 병실의 죽음을 아리에스는 ‘역전된 죽음’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역전되지 않은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몇몇 인도주의적 심리학자와 사회학자들의 주장대로 죽음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며 그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과연 ‘자연적인’ 태도일까? 아리에스에 의하면 그런 태도는 기껏해야 18, 19세기에 등장한 낭만주의로의 회귀일 뿐이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사람들은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죽음에 익숙해지고 죽음과 더불어 잘 살아왔다.
죽음이 철저히 배척되는 오늘날에는 ‘우리는 모두 죽는다’라는 말이 일종의 저주처럼 들리지만, 죽음과 삶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고 죽음이 공동체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시대에 그것은 삶이 표현하는 ‘외침’이었다. 의학의 발달로 야생상태의 죽음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대인의 착각이다. 아리에스는 오히려 중세 사람들이 길들여져 있던 죽음은 오늘날 야만적인 것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한다.
유럽의 성당은 그 자체가 마을 사람들의 거대한 무덤이었고 성당에 딸린 묘지는 사회적 공공장소인 동시에 오락의 장소였다. 프랑스 파리의 중앙시장이 묘지에 이웃해 있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아리에스는 길들여진 죽음의 가시적 흔적을 중세의 관을 장식했던 횡와상(橫臥像)에서 찾고 있다. 횡와상은 단순히 종말론적 죽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땅과의 연속성, 내세에서의 휴식이라는 두 주제를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리에스의 이런 지적은 충격적이다. 중세를 기독교 세계관이 지배했던 시대라고 여겼던 믿음이 소박한 것이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리에스는 유럽과 미국의 성당, 묘지, 문학작품, 미술작품, 유언장 등 죽음과 관련된 거의 모든 역사적 유물과 자료를 철저하게 파헤침으로써 죽음의 의미가 시대마다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책의 진정한 미덕은 개념적으로 삶의 문제를 포착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반성하게 한다는 데 있다. 삶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잘 죽는 법’을 찾아낼 수 있을까? 고민스럽다.
이유선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철학 yusunl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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