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낭만파 시인 노발리스는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가? 항상 집을 향해 갈 뿐”이라고 노래했다. 최근 나온 윤재철씨의 시집 또한 노발리스처럼 자연과 영적 일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특히 생명 근원으로의 회귀를 노래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그 접근법은 동서양간의 거리만큼이나 다르다. 그의 시에 나오는 ‘집’은 신비로 둘러싸여 예기를 내뿜는 창백한 죽음의 집도 아니고 공동체의 향수를 상기시켜 주는 고향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창신동 골목길 셋방’일 뿐이다.
‘뇌졸중으로 쓰러져/의식이 점차 혼미해지면서/아버지는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나중에는 의식이 없어/아무 말도 못하면서/짐승처럼 몸부림만 쳤다/팔목이며 발목이 벗겨지도록/집으로 가자고/고향도 아니었다/집이나마 창신동 골목길 셋방이었다’(‘아버지’)
이 시에서 뇌졸중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자고 몸부림치는 통에 침대 네 귀퉁이에 사지가 묶이고 만다. 아버지가 안식을 얻을 공간이 남루한 생의 버팀목이었던 산비탈 셋방이라는 점에서 그 운명은 애처롭지만, 뜨거운 삶에의 열망은 오히려 힘차다. 부나방처럼 도시의 불빛에 멍들었으나 대도시라는 ‘전제적 문명’ 속에 그 작은 날개로 온갖 깃을 치며 살아남으려는 역설이야말로 생명의 환희다.
이러한 모습은 시 ‘공주시장’에서 시장 좌판에서 비 맞고 있는 오이가 다시 밭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변주된다. 이미 상품이 된 오이가 밭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우의(寓意)는 시퍼렇게 살고 싶은 삶에의 싱싱한 도전이 아니고 무엇일까.
‘사랑도 추억보다는/그렇게 가슴에 박혀 뽑히지 않는/푸른 잎의 미늘인지도 모르겠어요’(‘미늘’)
이 시의 고압변전실 안 시멘트 바닥 틈에 피어난 민들레꽃 역시 현대 문명의 질주에 제동을 거는 본원적인 생명이다. 그런데 시인이 보는 것은 변압기 소리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 노란 꽃이 아니라 앉은뱅이처럼 누워 허공에 겹겹의 미늘을 들이미는 푸른 잎사귀다. 추억이란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일이며, 사랑이 끝난 뒤에도 사랑의 완성을 미화하는 것이다. 한사코 땅바닥에 누워 허공을 찔러대는 삐죽삐죽한 잎사귀는 사랑의 행위를 현재진행의 생생함으로 간직하고픈 열망의 표상이다.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윤씨의 이번 시집은 생활시의 긍정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90년대 이후 ‘후일담’의 미화에 주력했던 민중시가 그 깊은 추억의 그늘에서 벗어나 ‘전제적인 문명’과 맞서는 방법이 이 시집의 소박하고 ‘순진무분별’하기까지 한 근원적 회귀를 통해 힘을 얻고 있다. 인디오의 자루 속에 형형색색의 씨감자가 뒤섞여 있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어느 하나는 먹을 것을 건지기 위해서인 것처럼 우리가 돌아가야 할 집은 이 현실 속에 있다. 시인에 따르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집은 거기에 있다”(‘사막’).
박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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