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아름다운 지옥’…누추한 천국 그 시절 그립습니다

  • 입력 2004년 4월 2일 17시 39분


장편 ‘아름다운 지옥’을 낸 작가 권지예씨. 자전적 주인공인 김혜진은 자신이 9년간 머문 서울 목조집에서 안쪽의 장지문과 바깥의 유리문 사이에 놓인 좁다란 툇마루를 사랑한다. 마당에 심은 라일락 나무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이기 때문이다.사진제공 문학사상사
장편 ‘아름다운 지옥’을 낸 작가 권지예씨. 자전적 주인공인 김혜진은 자신이 9년간 머문 서울 목조집에서 안쪽의 장지문과 바깥의 유리문 사이에 놓인 좁다란 툇마루를 사랑한다. 마당에 심은 라일락 나무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이기 때문이다.사진제공 문학사상사
◇아름다운 지옥/권지예 지음/1권 275쪽, 2권 253쪽 각권 7500원 문학사상사

2002년 이상문학상 수상작가인 권지예씨(44)가 첫 장편소설을 냈다. 출판사측이 “작가의 자전적 성격이 강하다”고 밝힌 대로 작가와 여주인공 김혜진 사이의 비슷한 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둘 다 1971년에 열두살이었고, 후에 작가를 지망하게 됐다. 스무살 무렵 영특한 여동생을 잃었고, 서울의 명문 여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이 작품은 작가의 분신인 김혜진이 식구들과 함께 71년 서울 전농동 근처 대로변의 기역자형 목조 기와집으로 이사 와 9년 후 떠나기까지의 ‘누추했지만 천국 같았던’ 세월을 담은 성장소설이다. 김혜진은 방첩부대에서 제대한 아버지와 억척스러운 어머니, 사내아이 같지만 영특한 여동생 혜선과 함께 성장의 나이테를 그려 간다.

혜진이 여대생으로 자라기까지 이웃에는 나이 어린 술집 작부 진숙이 살다가 죽고, 혜진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생겨난다. 혜진에게서 첫 키스를 빼앗는 대학생 하현섭이 나타나고, 진숙에게 아이를 낳게 한 ‘멋쟁이 대학생’ 박영문이 혜진에게도 묘하게 접근해 격랑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처럼 다소 흡인력을 갖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2권에 몰려 있으며 1권의 경우 긴장감이 떨어진다.

시간에 따라 내용이 흘러가는 구성인데 전반부 대부분은 유기적인 인과(因果)가 없다. 그래서 다음 장면을 궁금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취약점이 있다.

특히 군 제대 후 벌통을 치면서 서울 생활을 멀리하게 된 혜진의 아버지가 어떤 경위로 행정대학원에 진학하고 국회의원이 되려고 했는지, 어떻게 양복점을 하게 됐으며 작은 가구업체를 인수하게 됐는지 변화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편이다.

게다가 혜진이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이야기는 세련되고 우아한 표현들이 유치한 표현들과 애매하게 얽혀 있다. ‘삶의 조화랄까, 우주적인 눈으로 따뜻하게 바라보게 되는’ 등의 표현이 전자라면, ‘물똥 누듯이’ ‘외면적으로 꿀리지 않게’ ‘77년 칠땡 럭키 세븐이 두 개나 겹친’ 같은 표현은 후자다.

이는 서울 변두리 소녀 김혜진의 체험 수준으로 풀어 가던 이야기 사이에, 성년이 된 ‘나, 김혜진’이 회고하는 어구들을 무분별하게 끼워 넣음으로써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2권 역시 박영문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갖게된 김혜진이 ‘극적인 사건’을 통해 격렬한 감정변화를 겪는 과정이 나오지만 설득력이 약해 보인다.

그러나 격찬받을 만한 대목들도 있다. 폐암을 앓아 온 여동생 혜선이 홀로 방에서 숨져 버렸다는 사실을 혜진이 알고 슬픔을 쏟아내는 대목은 절절하며 가슴을 친다. 혜진이 숨진 혜선의 볼품없는 발을 보면서 생(生)이 사실은 비루한 것임을 가슴에 비수가 꽂힌 듯 깨닫는 대목은 이 소설의 주제를 순식간에 드러내는 것 같다.

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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