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22년 스탈린 공산당서기장 취임

  • 입력 2004년 4월 2일 18시 37분


이오시프 스탈린!

그가 죽었을 때 세계는 환호했다. 자유진영은 물론이고 크렘린에서도 안도의 한숨이 새나왔다. ‘스탈린 독살설’의 유력한(?) 용의자인 정치국원 베리야. 그는 흐루시초프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그를 해치우고 모두를 구했어….”

그러나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역사를 다시 쓰는 것’(오스카 와일드)이라고 했던가. 스탈린 체제에 대한 평가는 극으로 갈린다.

“스탈린은 범죄성에서, 그 믿기지 않는 극악함에서 큰 인물”(조지 캐넌)이라는 비난과 “그는 우연히 러시아대혁명의 앞에 서 있었으며, 단지 그 때문에 위대해진 실체 없는 인물”(E H 카)이라는 냉소가 있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는 “우리의 아버지”(러시아정교회)였고 사후에도 “독재자였으나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블라디미르 푸틴)다.

프랑스의 작가 로맹 롤랑은 스탈린을 만나 친구가 되었고, 공산주의에 충성을 선서했던 앙드레 지드는 그를 만난 뒤 등을 돌렸다.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은 책을 낼 때마다 말을 바꾸었다.

스탈린이 없는 ‘강대국 소련’은 생각하기 어렵다.

소련공산당서기장 취임 6년 만인 1928년, 전권을 장악한 스탈린은 의욕적으로 제1차 5개년계획을 추진했다. 그 ‘성취’는 눈부신 것이었다. 그 짧은 기간에 소련은 제2의 공업생산국으로 도약한다.

스탈린 사후 소련에서는 그 누구도 그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지 못했다. 그 누구도 그렇게 개인의 삶을 흔들어놓지 못했다.

스탈린이 남긴 최대의 유산은 ‘공포의 기억’이다. 그가 권좌에 있는 동안 2000만명이 추방되거나 유배됐고 그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외국인 히틀러’에게서나 보았던 악(惡)을 견뎌야 했던 소련인민들. 그들은 그 끔찍한 악몽이 있었기에 여전히 가혹했던 스탈린의 후계자들을 잘(?) 겪어낼 수 있었다. 그 어떤 억압과 잔인함도 그보다는 나았던 것이다.

그런 스탈린을 위해 최대의 변명을 헌사한 것은 장 폴 사르트르였다. “역사적 경험으로 볼 때 사회주의 초기 단계에서 테러와 개인숭배는 필연적이다.”

그 뒤로 많은 동지들이 사르트르의 곁을 떠났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