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租界)’로 상징되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침탈이 이곳에서 시작됐고, 1921년 중국공산당이 이곳에서 깃발을 올렸다. 1, 2차 ‘상하이사변’은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상하이코뮌’으로 문화혁명의 피바람이 일었다.
1927년 4월.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蔣介石)가 ‘반공(反共) 쿠데타’를 일으킨 곳도 상하이다. 노동자와 공산당원을 무차별 학살하고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내키지 않았던 국공합작을 끝장낸 것이다. 그리고 난징(南京)에 그들만의 (국민당) 단독정부를 수립한다.
국공합작은 보수 군벌과 제국주의 열강을 타도하기 위한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의 정치적 대타협이었다. 국민당의 속과 겉을 공산당식으로 개조해 국공합작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말년의 쑨원(孫文)이었다.
그러나 그가 병사하자 국민당은 좌우로 분열하기 시작했다. 좌파의 세력 확장에 위기감을 느낀 지주와 자본가 세력이 들고났다. 장제스는 이들 반(反)합작 세력을 등에 업는다.
그것은 쑨원에 대한 정치적 배신이었다.
민심은 돌아서고 있었다. ‘상하이 쿠데타’ 후 그는 보수 노선으로 치달았다. 갈수록 우경화돼 갔다.
그에게는 적이 많았다. 여전히 군벌은 제 갈 길을 가고 있었고, 농촌으로 파고든 공산당은 세를 불려나가고 있었다. 여기에 일본과 전쟁을 치러야 할 처지였다.
최대의 패착은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침략에 대해 ‘먼저 공산당을 섬멸한 다음 외적을 친다’는 원칙을 정한 것이다. 인민의 절대다수는 ‘내전중단 일치항일(抗日)’을 원하고 있었다.
제2차 국공합작으로 마지못해 일본과 싸우면서도 그는 공산당과 내전에 대비해 군대를 아꼈다.
그리고 2차 대전이 끝나자 3차 국공합작을 끝내 거부하고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을 겨누었다. 그에게는 미국이 있었고, 월등한 군사력이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마오쩌둥의 대의(大義)를 취하였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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