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문화재 지정 이후 62년 만이다. “우리 문화재의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청산했다”는 찬사를 들을 만했다.
문민정부 시절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의 성과였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개명되고 옛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됐다. 그건 썩 잘한 일이었다. 인적(人的) 청산이 아니면 물적(物的) 청산이라도 해야 했다. 그나마 광복 반세기 만의 일이니.
일제는 조선왕조와 관련된 것이라면 어떻게든 깔아뭉개려 들었다.
1909년 느닷없이 창경궁(昌慶宮)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고 벚나무를 심었다. 이름도 창경원(昌慶苑)으로 바꾸었다. 왕궁은 졸지에 유원지로 전락했으니 일제의 휼계(譎計)였다.
비원(秘苑)도 일제가 붙인 이름이다. 창덕궁의 뒤뜰(후원·後苑)은 ‘비밀스럽고 음습한’ 곳이 되고 말았다.
이뿐인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목조건축물 경판전(經板殿·국보52호)은 경판고(經板庫)였다. ‘전(殿)’에 모신 대장경이 ‘고(庫)’에 처박히게 된 것이다.
1397년(태조6년) 4월 완공된 흥인문은 성을 쌓을 때부터 어려움이 많았다. 지형이 낮은데다 습해 말뚝을 박고 돌을 채워 다져야 했다.
그래서 흥인문 현판의 글자 수는 네 글자로 늘어났다. 땅을 높이고 지세(地勢)를 보(補)하고자 산맥 형상의 ‘지(之)’ 자를 넣었고, 부러 두 줄로 썼다.
흥인문은 ‘동대문(動大門)’이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정사가 어지러웠던 광해군 말년에는 북서쪽으로 기울었고 임오군란 때는 남동쪽으로 기울었다고.
임진왜란 때는 왜구의 선봉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곳을 지나 한양으로 쳐들어 왔다. 1905년 일제는 흥인문을 헐어낼 계획이었으나 이를 기려 고적(古蹟)으로 남겨두었다고 하니!
흥인문의 600년 성상은 신산한 것이었다. 서울의 빌딩 숲 한가운데에 버티고 있는 그 모양새는 옹색하기만 하다.
지하철 1호선과 4호선이 다퉈 그 땅 밑을 치달리고 있고, 인근에 들어선 대형 쇼핑몰은 지하수를 빨아들여 지반 침하가 우려되고 있다.
이래저래, 흥인문은 꺼져 들어가고 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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