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24>卷三. 覇王의 길

  • 입력 2004년 4월 12일 18시 51분


20萬을 산 채 땅에 묻고⑥

한신은 항우와 경포, 포장군이 꾸미는 일을 범증에게 알린 뒤 간곡하게 말했다.

“군사(軍師)께서는 반드시 상장군을 말리셔야 합니다. 만약 항복한 진나라 장졸들을 해친다면 우리가 쉽게 관중에 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영영 함곡관을 넘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범증이 이상했다. 몹시 난감해하면서도 생각에 잠긴 얼굴이더니, 한참 뒤에야 두 손을 마주 잡고 어색하게 비벼대며 띄엄띄엄 말했다.

“그리되면 신안(新安) 서쪽의 진군(秦軍)은 모두 죽기로 싸워…우리가 관중에 드는 게 더뎌지겠지만…어쩌겠나. 이미 상장군이 그리 마음을 정했다니…여럿이 정한 군중의 논의를…이 늙은이가 손바닥 뒤집듯 그리 쉽게 뒤집을 수 있겠나? 더구나 이제 함곡관까지는 3백 리밖에 남지 않았고, 그 사이에는 큰 성곽도 그리 많지 않은데….”

그러고는 얼른 일어나 항우를 말리러 가려 하지 않았다. 이미 정해진 항우의 뜻은 굳이 거스르고 싶지 않은 듯했다.

몇 번 더 간곡한 말로 범증의 마음을 돌려 보려던 한신도 끝내는 마음을 바꿔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우 낭중(郎中) 주제에 공연히 상장군의 뜻에 맞서다가 홀로 화를 당하느니, 입을 다무는 편이 스스로를 지키는 길이라 여기고 적당히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범증의 군막을 나와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는 한신의 가슴 속은 그날 밤의 하늘처럼 어둡고 무겁기 짝이 없었다.

(군사니 아부니 하는 칭호가 다 허울뿐이었구나. 군사들의 스승[군사]이 어디 있고, 상장군의 버금 아비[亞父]가 어디 있느냐. 벌써 주인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늙은 청지기가 있을 뿐이다. 나는 범증의 깊이 있는 헤아림과 침착이 항우의 과격함과 성급을 달래고 억눌러 우리 군사를 마지막 승리로 이끌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구나. 끝내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내 이제 섬길 주인을 다시 찾아야겠구나…. )

한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군막으로 돌아갔다. 일년이 넘게 따라다니며 틈이 날 때마다 계책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서운함보다는, 이제 항우가 하려는 일이 더욱 한신을 절망하게 했다.

범증까지 나서서 막지 않으니 20만 항졸(降卒)을 모조리 없애 버리려는 항우의 뜻은 이후 아무런 거침없이 진척되었다. 날이 밝자 경포와 포장군은 항복한 진나라 장졸들의 움막을 모두 항우가 지정한 골짜기 안으로 옮기게 했다. 그런 다음 다시 자신의 군사들이 묵을 군막을 골짜기 앞에 겹겹이 세워, 그들이 길을 열어 주기 전에는 아무도 그 골짜기에서 빠져 나올 수 없게 했다.

해질 무렵 하여 경포와 포장군은 다시 항졸들의 움막에 술까지 넉넉히 돌렸다. 흠뻑 취해 잠들게 함으로써 한밤중에 당할 기습을 더욱 방비하기 어렵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에 비해 초나라 군사들은 하루종일 쉬면서 그날 밤에 있을 끔찍한 야습을 남몰래 채비하게 했다. 그리고 날이 저물자 고기와 밥을 배불리 먹인 뒤 병장기를 갖추고 군호(軍號)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게 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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