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진우/‘차이인정’ 보혁相生의 길 찾자

  • 입력 2004년 4월 18일 19시 08분


희망과 우려,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는 가운데서도 정치의 지각변동은 비교적 ‘조용하게’ 이뤄졌다. 이번 선거는 1988년 이래 우리에게 익숙할 뿐 아니라 정치불안의 원인이기도 했던 여소야대(與小野大)의 정치구도를 마침내 여대야소(與大野小)로 바꾸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지만, 그것은 예전 선거와 비교할 때 비교적 깨끗하게 진행됐다는 점에서 조용한 변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적대 아닌 생산적 경쟁관계 기대▼

물론 정치적 지각변동의 의미는 단순한 세력관계의 변화로 축소되지 않는다. 세력관계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어서 여당이 다수당이 됐다는 것만으로는 지각변동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시대 정치문화와의 단절을 의미할 수도 있는 근본적 지각변동은 오히려 민주노동당의 국회진출로 야기됐다. 이제까지 이념적 낙인찍기와 정치적 배제의 대상이던 사회주의 정당이 마침내 제도권에 진입함으로써 우리 정치권은 명실상부한 진보와 보수의 대결로 재편됐다. 그뿐 아니라 8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헌신한 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당선되어 진보 좌파는 이제 확실한 ‘집권세력’으로 등장했다.

이제까지는 여당이든 야당이든 오직 권력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이념과 정책에서는 차이가 없지 않았는가? 선거 때마다 민주 대 반민주, 진보 대 보수, 개혁 대 반개혁의 편가르기가 기승을 부리지만 실제 진정한 진보와 보수정당은 없지 않았는가? 이번 선거가 고질적인 색깔논쟁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으면서도 비교적 색깔이 분명한 진보와 보수의 양당구도를 만들어낸 것은 정치문화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이러한 국민의 뜻을 민주적 정치문화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는 어떻게 분열된 국론을 극복하고 상생의 길을 찾을 수 있는가? 많은 사람이 소모적인 정쟁과 편가르기에 지쳐 타협과 대화, 공존과 상생의 정치를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감히 ‘차이의 정치’만이 진정한 통합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하려 한다.

첫째, 이제까지의 정치가 권력투쟁을 위한 상대방 흠집내기의 네거티브 정치였다면 새로운 정치는 이념과 정책에서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는 포지티브 정치여야 한다. ‘내가 살려면 상대를 공격해야 한다’는 전근대적 편가르기는 역설적으로 정당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을 때 기승을 부린다. 이런 점에서 진보와 보수 정당은 하루빨리 이념과 정책의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 고질적 적대관계를 생산적 경쟁관계로 전환시켜야 한다.

둘째, 우리가 성숙한 차이의 문화를 일궈가려면 우선 민주적 절차의 정당성을 존중해야 한다. 정치가 단순한 권력투쟁의 장으로 전락하면, 목적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힘이 없다 싶으면 목소리를 높이고, 상대방에게 손가락질 해대고, 그것도 안 통하면 단식투쟁을 하거나 거리로 나가 장외투쟁을 하다가도, 일단 권력을 잡으면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배척하지 않았는가? 여당의 상습적인 날치기와 야당의 고질적인 장외투쟁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네거티브 정치의 극치다. 이런 악습을 극복하려면, 우리는 민주적 절차의 정당성을 존중하는 법치문화를 한층 더 발전시켜야 한다.

▼민주적 절차 정당성 존중해야▼

끝으로, 진보와 보수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상생의 민주문화를 이루려면 선명성만 내세우는 운동권 논리가 극복돼야 한다. 합리적 진보진영은 자신의 이념을 제도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선명한 대중투쟁 노선을 포기해야 하지만, 개혁적 보수진영은 국민에게 수용될 수 있는 정책을 개발하기 위해서도 ‘운동권은 급진세력’이라는 경직된 사고를 과감히 버려야 한다. 이렇게 차이를 인정하는 민주적 정치문화를 발전시킬 때에야 비로소 우리 사회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조용한 혁명’은 생산적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이진우 계명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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