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자살한 게 그 다음날이다.
베니토 무솔리니. 그의 최후는 비참했으나 1922년 무솔리니가 불과 39세의 나이로 이탈리아 총리에 올랐을 때 국민들은 “일 두체(위대한 지도자)”라며 환호했다.
무솔리니의 등장은 의회정치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그러나 국민들은 조국이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면 기꺼이 독재에 복종할 태세가 돼 있었다.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반란이었다.
처칠은 그를 ‘천재의 화신’이라고 불렀고, 스탈린은 ‘현자(賢者)’라 지칭했다. 집권 초기 무솔리니의 치적은 눈부셨으니!
계속되는 파업과 소요로 기진(氣盡)한 이탈리아는 그의 지도력 아래 활력을 되찾았다. 경제는 차츰 안정됐고 사회개혁과 공공사업계획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가톨릭교회와 오랜 불화도 청산했다.
‘제국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면 무솔리니는 진정한 이탈리아의 영웅으로 남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1935년 그는 고민 끝에 에티오피아 침공을 결정한다. 권력의 오만이었다.
그는 히틀러에게 조바심을 냈다. 승승장구하는 히틀러를 지켜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추축국(樞軸國)의 2류 지도자로서 나치 총통의 연설에 다소곳이 귀를 기울여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견딜 수 없었다. 1940년 10월 갑작스러운 그리스 침공과 치명적인 패배는 그 소산이다.
혹자는 “이탈리아의 역사에서 무솔리니의 등장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시대의 조종(操縱)이었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에 끼인 유럽대륙은 파시즘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 경제적 공황과 정치적 아노미가 빚어낸 ‘시대의 질환’(토마스 만)이었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당이 극우(極右)의 날개를 단 것은 시대의 요청이었다. 대중은 파쇼를 원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혹독했다. 무솔리니의 말 그대로였다.
“국가 안에 모두가 있고, 국가 밖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으며, 국가에 반대하는 그 누구도 존재할 수 없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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