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플댄스’에서 춤은 언제나 남자가 청하는 것이다. 여자들은 선택을 받지 못하면 무도회장에서 벽이나 지키고 서 있어야 한다. 그런 창피를 면하려고 여자들은 노출과 화장으로 남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려는 경쟁을 벌여 왔다. 한 마디로 커플댄스의 기본원칙은 남성은 리드(lead), 여성은 팔로(follow), 즉 부창부수(夫唱婦隨)다.
영화 ‘탱고 레슨’에서는 자기주장이 강한 유럽 여성이 아르헨티나 댄서에게서 탱고를 배우다 남성 본위의 방식에 화를 내며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탱고의 진수는 파트너간에 힘을 주고받는 호흡에 있다. 남성은 리드하면서 여성을 최대한 배려하고, 여성도 그저 남성의 힘에 이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저항력을 전달해 파트너간의 긴장을 조성해야 한다.
이 때문에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한결같이 “탱고에서 인생을 배운다”고 말한다. 탱고를 배우면서 상대를 리드해야 하는 순간과 상대방의 결정을 따라야 하는 순간,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법과 물러나는 법, 힘을 줘야 할 때와 뺄 때를 판단하는 삶의 지혜를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춤에는 그 사회의 총체적 문화와 삶의 태도가 담겨 있다. 춤은 꼭 고급문화에서 저급문화로 한쪽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하층계급의 자유로운 몸짓이 귀족계급의 춤으로 확산되고, 식민지의 토속적 리듬이 정복자의 주류문화를 대체하기도 한다. 이 책은 왈츠부터 살사, 탱고, 플라멩코 등 ‘커플댄스’의 변화를 통해 ‘춤의 사회사’를 다채롭게 소개한다.
‘미뉴에트’와 ‘왈츠’는 같은 3박자 춤이면서도 각각 프랑스혁명 전과 후를 뚜렷이 구분해내는 시대의 상징이었다. 격식을 갖추고 차갑게 거리를 유지하는 미뉴에트가 전형적인 귀족계급의 춤이라면, 파트너의 팔과 허리를 안은 채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상대방의 호흡과 땀방울을 아주 가까이에서 느끼는 왈츠는 시민계층을 대표하는 춤이었다.
이후 커플댄스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본격적으로 폭발해 전 세계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살사, 탱고, 메렝게, 맘보, 차차차, 볼레로, 린디홉, 지터버그….
라틴아메리카는 유럽을 제치고 ‘20세기의 가장 음악적인 대륙’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것은 신대륙 라틴아메리카가 남미와 유럽 아프리카의 이질적 문화가 섞이는 용광로 역할을 했기 때문.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복자들은 수백만명의 아프리카인들을 라틴아메리카로 강제 이주시켰고, 이들이 고향에서 가져온 리듬은 신대륙에 대한 희망을 안고 몰려든 유럽 이민자들과 어우러져 새로운 에너지를 담은 춤으로 발전했다.
브라질의 카니발축제에 등장하는 ‘삼바’는 원래 앙골라의 춤 ‘셈바’(춤을 청한다는 의미로 배꼽을 만지는 일을 뜻하는 말)에서 온 것으로 브라질에 노예로 끌려온 아프리카인들이 추던 춤에서 유래했다.
카리브해 연안의 100여 가지의 다양한 리듬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살사’는 이제 ‘재즈’처럼 다면적인 의미를 지닌 음악용어로 자리 잡았다.
‘탱고’는 아르헨티나의 항구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뒷골목에서 유럽 이민자들이 삶의 애환을 달래며 추던 춤. ‘결코 채울 수 없는 욕망’ ‘이별을 전제로 한 만남’을 주제로 한 탱고는 어떤 커플댄스보다 격렬하게 맞부딪치면서도 비장미가 넘쳐흐른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인터넷 댄스동호회를 중심으로 커플댄스로 사교문화를 즐기는 바람이 불고 있다. 30, 40대 직장인 중에는 영어학원과 댄스학원을 번갈아 다니는 사람도 많다.
독일에서 문학, 음악학을 공부한 음악 칼럼니스트이기도 한 저자는 자신이 직접 춤을 배우며 만난 한국과 독일의 춤 애호가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인터뷰로 실어 책에 현장감을 불어넣었다.
“그래도 한국에서 춤출 줄 아는 남자들이 그렇지 않은 남자들보다는 훨씬 예의바르고 여자를 존중할 줄 안다는 것이 춤추기 좋아하는 한국 여자들의 한결같은 얘기였습니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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