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안보문제 전문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책 서문에서 무당, 창녀, 스파이가 세계문명의 초창기에 등장한 세 직업이며 그 중 두 번째로 오래된 직업이 스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그 장대한 스파이사(史)에서 유독 20세기의 첩보전인가. 18세기 각 민족국가의 수립과 함께 확장된 첩보활동이 20세기에 세계대전과 미소(美蘇)냉전을 겪으며 전례가 없을 정도로 스파이들을 대량 양산했기 때문이다. 구소련의 스파이 수만 해도 한때 20만명에 이르렀다.
이 책은 그 20세기를 보이지 않는 실로 수놓은 스파이 45인의 열전이다. 저자는 이 45명의 ‘역사상 최고 히트작’들을 스파이계의 은어에 따라 두더지, 전향자, 전설, 반역자, 우두머리, 파렴치한, 불가사의한 존재, 아마추어 등 8종류로 분류한다.
적국의 조직에 잠입한 스파이를 뜻하는 ‘두더지’의 대표적 인물은 해럴드 애드리언 러셀 킴 필비(1912∼1988)다. 케임브리지대 출신의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소련 공산당의 지시로 1930년대 영국의 해외정보국인 MI6에 들어가 승진을 거듭하며 영국과 미국의 대 소련 첩보전을 무력화시켰다. 그러나 MI6 국장 승진을 눈앞에 두고 신분노출 위험에 처한 그는 1963년 소련으로 망명해 영국과 미국의 첩보기관들을 아연하게 만들었다. 그는 소련 최고의 영예인 레닌 훈장을 받았으며 그의 장례식에는 소련 공산당 간부들이 총출동했다.
날조한 신분으로 위장한 스파이를 지칭하는 ‘전설’의 대표적 인물은 역사상 최고의 스파이로 꼽히는 리하르트 조르게(1895∼1944)다. 독일인으로 역시 소련 스파이였던 그는 열렬한 나치주의자로 변신한 뒤 독일 주요 신문사의 합동 특파원으로 일본에 부임한다. 그리고 일본이 동맹국인 독일을 도와 소련을 협공하기보다는 동남아를 공략하리라는 정보를 감쪽같이 빼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방향을 바꿨다. 소련이 일본의 침공에 대비해 동부전선에 배치했던 전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이동시켜 모스크바 근교까지 진격한 독일군을 격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처럼 완벽한 스파이였던 조르게도 일본인 무용가와 사랑에 빠져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 끝에 일본 첩보당국에 붙잡히고 만다.
스파이 세계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존재는 역시 하인리히 뮐러(1900∼?)다. 뮐러는 처음엔 나치 광신도의 동향을 감시하는 정보원이었고 나치가 집권하자 게슈타포의 대장으로 공산주의자를 박멸하는 데 앞장선다. 1945년 4월 히틀러와 함께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그는 전후 소련국가안보위원회(KGB) 간부로 다시 나타난다. 서독 정보부가 “그를 보았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믿을 수 없어 뮐러의 묘를 팠을 때 엉뚱한 시체 3구만 발견하고 말았다. 유능함이야말로 스파이 생존의 보증수표인 걸까.
이들에 비하면 여자 스파이로 가장 유명한 마타하리(본명 마가레타 젤러·1876∼1917)는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 프랑스 당국이 자신들의 실책을 떠넘길 희생양으로 삼기 위해 그 역할을 부풀렸을 뿐 풋내기에 불과했다.
책을 읽노라면 스파이야말로 진정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것은 저자가 말한 스파이의 3계명으로 압축된다.
“첫째, 절대 붙잡히지 마라. 둘째, 붙잡히더라도 우리(조직)는 결코 너의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셋째, 앞의 계명 외에 더 이상의 계명은 필요치 않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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