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관심이 부담스러워서였을까, 아니면 필요 없는 오해를 해명하고 싶어서였을까? 네그리는 2000년 ‘제국(empire)’과 ‘다중(multitude)’이라는 화두를 던진 저서 ‘제국’의 출간 이후 곧장 이 책 ‘혁명의 시간’ 집필에 들어가 2003년 탈고했다. 그 목표는 마키아벨리, 스피노자, 마르크스, 푸코, 들뢰즈의 계보를 이어 유물론을 재구성하는 것이고 그 방법은 ‘미래’와 시간에 대한 재규정을 통해서였다.
여기서 그는 앞으로의 시간을 표현하기 위해 ‘미래(future)’와 대비되는 ‘도래(to-come)’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네그리에 따르면 ‘미래’는 과거의 특이한 사건들을 평균화하는 통계적 상수들을 통해 예측되는 것이지만 ‘도래’는 현재의 창조적 도약이자 측정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도래’는 기획되고 예측되는 미래로서의 유토피아가 아니며 오히려 ‘가난’이라는 현재의 디스토피아적 상황이 찾아올 세계를 구성하는 기반이 된다.
가난은 아래로부터 ‘공통적인 것’을 구성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는다는 점에서 네그리에겐 열린 가능성으로 여겨진다. 가난을 연민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주체로 보았다는 점에서 네그리는 20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예수와 만나는 셈이다.
‘가난’이란 프롤레타리아의 다른 이름이다. 권력의 밑바닥에 놓여 있다 해방된 노예들은 ‘프롤레타리아’라는 공통의 이름을 얻음으로써 미래를 열어젖혔다. 이제 탈근대의 상황에 놓인 가난한 자들은 ‘다중’이라는 새로운 공통의 이름을 획득함으로써 ‘도래할 민중’이 된다. 동시에 ‘제국’은 혁명의 시간을 거치며 다중의 ‘코뮌(commune)’이 된다.
제국에서 일어날 혁명은 과거의 그것과는 다르다. 근대의 혁명이 봉기와 의식화를 통한 저항이었다면 다중이 주도하는 탈근대의 혁명은 유통과 기동성, 탈주와 전염이라는 확산의 흐름을 통해 진행된다. 무엇보다 탈근대 혁명의 시간은 삶과 정치를 분리하는 근대적 구획을 지워버린다.
네그리에 따르면 정치란 자신의 삶을 바꾸는 것을 뜻하고 삶은 바로 대표자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자신을 바꾸어 가는 과정이기에 정치적이다. 따라서 혁명은 권력의 전복이기 이전에 자기 삶을 긍정하며 구성하는 사건이다. 다중의 저항은 국가적인 척도를 극복하고 자기 가치를 구성하는 삶으로 경험된다.
근대의 인간이 동물과의 종차(種差)를 통해 자기 이름을 확보했다면 이 책에서 탈근대의 인간은 기계와의 접속을 통해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그 이름은 사이보그 혹은 일반지성이며 그 윤리는 분산되어 있으면서도 하나의 집합적 신체를 이룰 수 있는 접속의 능력과 변이의 잠재력이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미래를 기계에서 발견했지만 기계가 자신의 미래를 자본주의에서 발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측이 네그리에게 적극적 실천 지침으로 작동한 것이다. 인간-기계인 다중에게 네그리는 이렇게 요구한다.
“복종하지 말고 자유롭게 행동하라. 죽이지 말고 생성하라. 착취하지 말고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라.”
손애리 서울산업대 강사·사회학 dancingrabbit@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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