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리더십]<1>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원

  • 입력 2004년 6월 13일 18시 47분


《2004년 한국사회가 부닥치고 있는 근원적인 문제 중의 하나는 바로 리더십의 부재라는 지적이 많다. 지난 50여년간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수직적 권위주의 리더십은 무너졌지만 이를 대체할 합리적 통합적 리더십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보는 이런 문제의식 아래 우리 정치권의 잠재적 리더그룹을 대상으로 한 집중 인터뷰를 통해 이들의 리더십의 장단점을 점검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한 사람당 2시간 이상 자유로운 방담 형태로 진행된 인터뷰에는 본보 이동관 정치부장을 비롯한 정치부의 각 분야 담당기자들이 참여했다. 인터뷰 대상은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차기 대선에 도전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본보 정치부 기자들이 토론을 거쳐 선정했다. 게재 순서는 정당 의석순(같은 정당 내는 가나다순)으로 하되 인터뷰 일정 등에 따라 일부 조정했다. 》

8일 오전 7시44분. 서울시내 모 음식점에 들어선 열린우리당 김근태(金槿泰) 의원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물씬 풍겼다. 다소 푸석푸석한 얼굴.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진지하다. 대화가 계속된 두 시간 동안 별다른 자세 변화가 없다. 디저트로 나온 수박을 포크로 자르다 그만 수박 조각이 접시 바깥으로 떨어졌다. 거리낌 없이 그는 밥상 위의 수박 조각을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김근태의 리더십은 갈등하는 햄릿이라는 평이 많다”고 은근히 찔렀다. 즉각 반응이 온다. 평상시에 비하면 매우 빠른 편이다.

그는 “우리가 부닥치는 모든 것은 원칙의 문제”라고 불쑥 말했다. 민주화운동을 하던 시절, 투옥과 칠성판(고문대), 매질과 전기고문을 당해 죽음의 그림자를 언뜻 언뜻 보는 한계상황에서도 변절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원칙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다. 김근태의 사유와 언어는 갈등의 지류(支流)를 따라 결국 ‘원칙’이라는 바다에 모여 든다.

그는 대뜸 과거 민주화운동 시절로 얘기를 끌고 갔다. “신군부 정권이 기승을 부릴 때, 아무도 도전하지 않을 때,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조직해 돌파했다. 양김이 분열돼 선거(87년 대선)를 치를 때 감옥에 있었다. 교도관에게 ‘선거 결과가 어떻게 됐느냐’고 묻자 ‘그걸 몰라서 묻느냐’고 했다. 살기가 싫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도 1인 보스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밖으로는 옹호하고 안에서는 싸웠다. 역사의 딜레마 속에서 어떻게 과감할 수 있느냐. 용기와 결단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동시에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삶은 딜레마였다. 인터뷰 도중에도 그는 여러 차례 ‘딜레마’라는 용어를 썼다.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해진 지금의 정치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결단과 용기만으로 가능했던 시대는 지났다는 것이다. 투쟁이 아니라 지혜가 필요하다는 얘기는 곧 현실주의자로의 변신에 따른 고민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래서 그는 느리다. “70, 80년대 폭발적이고 스피디한 대학가요제의 노래가 지금은 느리게 들린다. 광속의 시대를 적응하기에 너무 느린 것 아니냐”는 질문을 해봤다. 김 의원은 “속도 내다가 전복될 수 있다. 잘못하면 죽는다”고 받았다.

그는 97년 대선 때는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에게 줄기차게 ‘잔류 민주당’ 조순(趙淳) 총재와의 ‘국민경선’을 요구했고, 지난 대선 때도 정몽준(鄭夢準) 후보와의 단일화를 요구하다 막판에 노무현(盧武鉉) 캠프에 합류했다.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원(왼쪽)은 최근 본보와의 집중 인터뷰에서 “결단과 용기만으로 가능했던 시대는 지났다”며 “투쟁이 아니라 지혜가 필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재야 출신인 그의 표정에는 이상주의자에서 현실주의자로 변신해가는 데 따른 고민이 엿보였다.-김동주기자

때로 결정이 늦다는 점에서 판단력과 결단력을 의심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선동적인 연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잠시의 전술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근본은 아니다. 그래도 대중성으로 코팅이 되어야 하는데…. 아무튼 지식인의 옷을 벗어 버리려고 한다. 내가 말하면서도 ‘너무 폼을 잡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든다”고 털어놓았다.

95년 정치권에 입문해 현실정치에 9년간 몸을 담았지만 아직도 ‘투쟁적 이미지’가 남아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억울해했다.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살아남자 주위에서 ‘독종이다’고 말하더라. 기가 막혔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성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당혹감을 느꼈다.”

김 의원은 ‘공정한 규칙을 중시하는 시장주의자’로 스스로를 규정한다. 그에게 자신의 경제관을 한 줄로 요약할 것을 요구하자 ‘새로운 성장을 위한 개혁’이라고 정리했다. 시장은 인간의 이기심에 기초하지만 그렇다고 정글은 아니다. 따라서 공정하고 투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적 좌파와는 거리가 멀지만 정부의 시장개입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케인시안’에 가깝다. 경기침체의 원인인 기업의 투자회피 심리에 대해 그는 “기업인들은 지금 광야에 선 나그네의 심정일 것이다. 상속의 불투명성, 비자금 등의 요인 때문에 도덕적으로 존경받지 못한다. 그래서 기업인들이 위축되는 것이다. 결국은 법과 규칙 외에는 없다. 예측가능하고 신뢰성을 높이는 실질적 방안이다. 기업인들이 이런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남북관계에 있어서는 진보적 색채가 강하다. 김 의원의 대북관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에 근접한다. 남북간의 경제협력과 화해는 곧 남한의 이익을 넘어 민족의 이익에 부합된다는 소신이다. 북한은 변하고 있으며, 점진적으로 시장경제를 수용할 것이라는 시각이다. 궁극적으로는 남북과 미국간에 3자간 평화협정을 맺자는 데 동의한다.

또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중시하지만 그렇다고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김 의원은 “한반도 사람들이 무시당하지 않고 사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한반도의 7000만명은 적은 수는 아니다. 패배주의에 빠지지 말라. 방향에 대해서는 별로 양보하고 싶지 않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라크 파병도 그 연장선상이다. 이라크 임시정부와 합의한 뒤 유엔평화유지군(PKF)으로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소신이다. 그러자면 파병 시기를 늦춰야만 한다. 또 한미동맹에도 어느 정도의 찬바람은 감수해야 한다. 그의 머릿속에는 미국의 강경파, 즉 네오콘(신보수주의 그룹)에 대한 불만과 경계심이 자리 잡고 있다. “네오콘의 말만 들으면 길이 안 보인다. 세계에도 여론이 있다”고 말한다. 이상주의적 기질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국내정치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노 대통령과 관계되는 대목에서는 더욱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통일부 장관에 대한 희망은 여전한 듯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만났는데 4가지 분야를 이야기하기에 통일 쪽을 맡고 싶다고 의사를 전달했다. 대통령의 답변은 없었다. 처음부터 나보고 보건복지부 장관 하라고 하면 맡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복지부 장관 맡으면 밀린 것처럼 보여 관료들과 함께 일하기 어렵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입각 문제에 대한 그의 고심은 좀 더 이어질 듯하다.

윤영찬기자 yyc11@donga.com

▼형 3명 월북說▼

“세 형이 실종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월북했다는 사실은 확인된 바 없다.”

김근태 의원은 4·15총선 전 불거졌던 세 형의 월북 논란에 대해 단호히 말했다.

그는 “6·25전쟁이 났을 때 나는 세 살이었다. 솔직히 기억이 없다. 그런데 총선 직전에 모 월간지가 나를 흠집 내기 위해 20년 전 민청련 사건으로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의 조사를 받을 때 일방적으로 안기부측이 제시한 파일 내용을 여과 없이 보도한 것이다”고 밝혔다. 이어 “다만 서삼촌(아버지의 이복동생) 한 분이 북한의 유명한 화가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 월간지가 정부기관이 작성했다는 ‘김근태 신원 및 배후 사상관계’ 파일을 인용해 ‘김 전 대표의 세 형이 월북, 북한에서 활동했다’고 썼으나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월간지 기자가 전화를 걸어와 ‘알아서 쓰라’고 했다”며 주로 큰형에 대한 얘기를 했다.

“큰형은 광복 이전 일본 와세다대를 다니다가 ‘서울 공대’에 들어갔다. 임원택(林元澤·학술원 회원) 전 서울대 교수가 친구였고 변형윤(邊衡尹) 서울대 명예교수는 큰형의 후배다. 형이 서울 공대에 1등으로 들어가 학생위원장을 했다는 기록을 본 일이 있다.”

그는 “학생위원장이었으면 찬탁 반탁운동에도 관여하지 않았겠느냐”는 질문에 “잘 모르겠다”면서 “더 중요한 것은 민족을 배반하고 일본제국주의에 부역했는지 안했는지 여부다. 좌우익으로 해방공간을 규정하는 것은 당시 국민 정서와 맞지 않는다”고 비켜갔다. 김 의원은 “큰형은 일본유학 중 기독교인이 됐다가 나중에 학생운동을 하면서 친일파 문제를 고민한 것 같다”고 말을 맺었다.

정용관기자 yongari@donga.com

▼클릭 김근태…www.gtcamp.or.kr▼

△생년월일=1947년 2월 14일, 경기 부천 출생

△학력=경기 양평 양수초등학교, 서울 광신중,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경력=민주화운동

청년연합(민청련) 의장, 국민회의 부총재, 민주당 최고 위원,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15, 16, 17대 국회의원

△병역=육군 보병 만기 제대

△존경하는 인물=김구 문익환

△좌우명=政者正也(정자정야·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

△감동받은 책=토지(박경리), 전쟁과 평화(톨스토이)

△감동받은 영화=공동경비구역 JSA,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좋아하는 노래=찔레꽃, 국밥집에서 (장사익)

△좋아하는 운동=축구

△주량=소주 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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