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재호/부사관의 생명수당

  • 입력 2004년 6월 29일 18시 25분


A씨는 중동에서 태권도를 가르친다. 이라크 파병이 결정됐을 때 그는 어떻게든 조국을 돕고 싶었다. 궁리 끝에 제자들이 공항에 나가 한국군을 맞이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슬람인 제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한다면 파병 장병의 안전에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CNN과 알자지라 방송이 이 모습을 놓칠 리 만무했다. 제자들도 흔쾌히 동의했다.

한국의 지인들과도 연락하면서 수개월간 준비했지만 김선일씨 피살사건이 터졌다. 자신은 물론 제자들의 신변까지도 위태로울 만큼 상황이 바뀌었다. 아쉽지만 계획을 접어야 했다. A씨가 걱정이 돼 국제전화를 했더니 누군가가 “이미 (중동지역을) 빠져 나갔다”고 했다. 마음이 놓이면서 한편 착잡해졌다. 그가 대형 태극기 수백 장을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 서울의 우리 모두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국회는 오늘부터 김씨 피살사건에 대한 국정조사를 시작한다. 앞으로 한 달간 정부의 무대응, 무능을 질타하는 의원들의 고함소리가 여의도를 뒤흔들 것이다. 죽은 김씨는 말이 없는데 한쪽에선 “그러기에 파병을 반대하지 않았느냐” 하고, 다른 한쪽에선 “그래도 파병은 해야 한다”고 맞설 것이다. 진상규명도 뒷전일 가능성이 높다. 논쟁을 좋아하는 의원들에게 이보다 더한 장마당이 있을까. 그러나 묻고 싶다. 국회가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지.

추가 파병이 결정된 게 지난해 10월이다. 그동안 테러 방지책 마련을 위해 국회가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테러방지법안 하나 처리하지 못했다. 인권침해 우려가 있었다면 수정안을 제출하든지, 아니면 다른 대안이라도 내놓았어야 했다. 3600명의 동생 같고 자식 같은 장병들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전장(戰場)으로 떠나는데 이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대책회의 한번 가졌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찬반논쟁으로 시간만 보냈다.

심지어는 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는데도 명색이 여당 의원들이 대놓고 파병 반대 서명을 받으러 다녔다. 대통령은 이런 그들을 청와대로 불러 달래야 했다. 이 자리에서 한 여성의원은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달라는 ‘평화의 기도’를 읊었다던가.

그런 속에서도 장병들은 경기 성남시 특수전사령부에서 현지 적응훈련에 땀을 흘렸다. 몇 마디 아랍어 인사말을 외우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고, 특전사 대원들은 낙하훈련을 쉬지 않았다. 이들이 한 차례 낙하(점프)할 때마다 받는 생명수당이 얼마인지 혹시 아는가. 부사관 기준으로 4만원이다. 좋아서 파병하는 정부는 어디에도 없다. 불가피하니까 보내는 것이다. 전쟁의 고통을, 구겨진 약소 국민의 자존심을 나만이 안다고 생각해선 곤란하다.

정치의 요체는 매듭을 풀어가는 데 있다. 한 매듭을 풀면 곧 다음 매듭으로 옮겨가야 한다. 그 과단성과 속도가 현대정치의 생명이다. 논쟁만 해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이제는 보내되,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4700만 국민이 마음의 방패가 되어 테러리스트들의 총탄으로부터 장병들을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국회의원이라면 늦었지만 그 선봉에 서야 한다. 그것이 김씨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이다.

이재호 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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