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적 아나키스트, 미하일 바쿠닌. 그는 직업이 ‘혁명가’였다. 반역아였다. 이단아였다.
이 ‘노동자의 영원한 동지’는 1835년 포병장교 시절 탈영을 감행함으로써 일찍이 그 반항적 기질을 드러낸다.
프랑스 파리에서 프루동, 마르크스와 교분을 쌓으면서 혁명의 소신을 다듬었다. “문명을 발전시키는 힘은 수사(修辭)가 아니라 행동이다.”
그러나 이들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마르크스에게 한번 등을 돌리자 그는 평생 적(敵)으로 남는다.
그는 ‘사적 유물론’을 받아들였으나 마르크스가 이를 “운명론으로 절대화시켰다”고 비난했다. 특히나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의 모호한 입장은 ‘반(反)혁명적 불장난’으로 비쳤다.
‘인민은 국가를 파괴할 뿐 아니라 한층 강화시켜 그들의 시혜자이며 감시자이며 스승인 당(黨)에 바쳐야 한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최악의 ‘지식인 전제(專制)’를 예고하고 있었다. 그 섬뜩한 우려는 현실로 나타난다.
바쿠닌의 아나키즘은 말하자면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에 대한 안티테제(?)였던 것이다.
그와 마르크스의 반목(反目)은 19세기 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혼선을 낳는다.
이들은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에 나란히 얼굴을 내밀었으나 인터내셔널은 두 거물을 포용하는 데 ‘숨이 찼다’.
이 혁명가는 기이하게도 대중이 아닌 개인, 체제가 아닌 역사의 도덕성에 더욱 이끌렸다.
그는 프루동에게서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세례를 받았다. “소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훔쳐온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유일한 생업(生業)이 ‘망명’이었던 바쿠닌은 시베리아에서 나폴리까지 전 유럽을 무일푼으로 떠돌았다.
아무에게나 돈을 빌려 썼고 빚에 쫓기면서도 개의치 않았다. ‘유쾌한 사기꾼’이었다. ‘빈틈없는 위선자’(마르크스)였다.
그의 생애는 치열했으나 구체적인 결과는 없었다. 그 의욕에 찬 방대한 저술은 거개가 미완성이었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계획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무얼 할 거요?”
그때가 되면…. 바쿠닌은 답했다. “내가 만든 그 모든 것을 다시 허물 거요….”
그의 생애에 걸쳐 단 하나의 주제는 오직 자유(自由)였으니!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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