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활/화수분은 없다

  • 입력 2004년 7월 4일 18시 19분


늘봄 전영택(田榮澤)의 소설 ‘화수분’은 언제 읽어도 가슴이 찡하다. 작가는 1920년대를 배경으로 가난한 젊은 부부의 고단한 삶과 동사(凍死)라는 형태의 비극적 죽음을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화수분이란 재물이 자꾸 생겨서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 보물단지다. 가령 쌀을 넣어 두었다가 꺼내서 밥을 지으면 또 쌀이 있고 다시 꺼내도 쌀이 가득 남아 있다. 결말에서 비치는 사랑과 부활이라는 메시지를 제쳐 두고 현실적 의미에서만 보면 소설 속의 화수분은 반어법적 명명(命名)의 극치다.

진짜 화수분이 하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옛날부터 세상살이가 힘들수록 이런 공상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를 뒤지더라도 그런 보물단지가 있을 리 없다.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른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분수에 넘치게 돈을 쓰고 버텨낼 수는 없다. ‘가지 않은 길’을 쓴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빚이 아무리 묘한 재간을 부린다 한들/자신이 낸 손실을 물어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고 말했던가.

수입을 생각 않고 우선 단맛에 겁 없이 신용카드를 그어 댄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가. 카드 빚을 갚지 못해 음습한 세계로 추락하거나 심지어 목숨까지 끊는 모습에서 연민과 함께 빚의 무서움을 절감한다.

더 고약한 모습은 국부(國富)를 키우지는 못 하면서 여기저기 목돈 쓸 생각만 하는 정부다. 마치 화수분이라도 가진 양.

굵직굵직한 사업이 경제원리를 무시한 채 쏟아져 나왔다. ‘선거에서 재미를 봐’ 일사천리로 강행되는 수도 이전과 미래형 혁신도시 건설, ‘제국과 변방’의 역학관계를 도외시한 자주국방 실현, 공무원 수 대폭 확대와 각종 복지 지출 확대에 따른 예산 부담…. 나랏돈이 아니고 정부 당국자들의 호주머니에서 돈이 나와도 과연 이렇게 용감할 수 있을까.

가뜩이나 재정은 이미 위험수역(水域)에 들어갔다. 국가채무는 정부 전망으로도 올해 말 200조원에 육박한다. 국민 한 사람당 평균 400만원에 가깝다.

이뿐 아니다. 농업개방에 따른 농어촌 지원에 10년간 119조원이 들어간다. 공적자금 원리금 상환에는 20년간 매년 2조원 이상 투입된다. 고령화사회에 따른 재정수요 급증과 ‘시한폭탄’인 국민연금 부실 문제도 ‘발등의 불’이다.

반면 국가 전체로 봐서 돈이 생길 곳은 갈수록 줄어든다. 경기침체의 긴 터널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경제의 활력은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다. 중산층이 몰락하면서 계층간 양극화도 뚜렷해진다.

사회 분위기 역시 경제의 미래를 낙관하기 어렵게 한다. 민주주의 시장경제 자유언론 등 핵심 가치가 도전받는 모습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대통령직속기관이 남파 간첩을 ‘민주화 인사’로 인정하고, 평양방송의 선동을 앵무새처럼 옮긴 일부 체제부정 세력조차 ‘반성의 세례 절차’ 없이 권력의 심장부에 진출해 ‘개혁과 진보’를 주장하는 뒤틀린 세상이다.

파괴는 한순간이지만 창조에는 시간이 걸린다. 아무리 명분이 거창해도 나라 장래를 나락에 떨어뜨릴 위험이 있으면 다시 생각하는 것이 옳다. 이제라도 정부는 냉정한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두고 나랏돈을 쓰기보다 버는 데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세상에 화수분은 없다.

권순활 경제부차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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