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마지막 충신 성충과 흥수.
의자왕 20년(660년) 나당연합군이 물밀 듯이 쳐들어오자 이들은 마치 입을 맞춘 듯 똑같은 군략(軍略)을 간했다. 한사람은 옥(獄)중에서, 또 한사람은 유배지에서였다.
그러나 백제가 탁상공론으로 시일을 허비하고 있을 때에 소정방을 앞세운 13만 당나라군은 서해를 건너 기벌포에 당도하였고, 5만의 신라군은 저항 없이 탄현을 넘고 있었다.
계백이 정병(精兵) 5000을 이끌고 황산벌에서 맞섰으나 군세(軍勢)는 신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수적 열세를 만회하고자 논산군 연산면 관동리 일대 협곡(峽谷)에 진을 쳤다.
군신(軍神) 계백과 신장(神將) 김유신이 겨눈 싸움에서 초반 기세를 올린 것은 백제였다.
병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장수가 스스로 식솔들의 목을 거두었으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으니, 처자가 적의 노비가 되어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다….”
신라는 초조했다. 당나라 군사에 앞서 부여에 입성(入城)해야 한다는 강박에 쫓기고 있었다. 황산벌에서 일시에 전세를 장악하려던 전략은 백제의 게릴라전에 물리고 있었다.
이때 신라가 쓴 고육지책이 ‘화랑 관창’이었다.
나이 열여섯의 관창은 아버지인 좌장군 품일의 뜻을 좇아 돌격대를 자원한다. 계백은 처음엔 붙잡혀온 관창을 살려 보냈으나 그 두 번째엔 목을 쳤다.
말안장에 실려 온 관창의 수급(首級)을 본 신라군은 분기탱천했다.
계백은 백제군을 끌어내려는 신라의 의도를 모르지 않았으나 기꺼이 황산벌에 뼈를 묻고자 했다. 어린 관창의 용맹에서 이미 백제의 운이 다하였음을 보았으니!
마침내 백제와 신라의 기마군사 4800기가 어우러진 최후의 일전이 벌어진다.
백제의 멸망을 묵묵히 지켜보았던 황산벌.
예나 지금이나 온통 붉은 황토로 일렁이는 산과 들녘엔 백제 유민(流民)의 한이 깊이 서려 있다.
그 까마득한 옛날엔 마한의 후예들이 피눈물을 뿌렸고, 꺼져버린 불씨를 다시 지피고자 했던 ‘후백제의 전사들’도 이곳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았으니.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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