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와 함께 최악의 ‘문화재 약탈자’로 꼽히는 나폴레옹.
그는 훗날 3년간에 걸친 이집트 원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프랑스군 최고사령관 나폴레옹이 350척의 함대에 3만8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집트로 향한 게 그의 나이 불과 스물아홉때인 1798년.
이집트 원정은 영국이 인도로 나아가는 통로를 차단하고자 함이었으나 그에게는 다른 야심이 있었다.
그는 167명의 저명한 학자와 예술가들을 대동했다.
그러나 이들은 정작 자신의 행선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더더군다나 자신들이 훗날 ‘이집트학(學)’의 선봉이 되리라고는.
기하학의 선구자인 몽주와 염소연구로 유명한 베르톨레, 수학자 푸리에와 화학자 콩테, 지질학자 돌로미외가 거기 있었다. ‘프랑스의 대학을 이집트에 옮겨왔다.’
이집트 고대문명은 충격이었다. 유럽이 아직 원시적인 사냥 생활에 젖어있을 때 그들은 통일왕국을 이루었고,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으니.
이집트 원정은 실패한 전쟁이었으나 그 문화적 함의는 엄청났다.
1799년 7월 19일, 나폴레옹군은 나일강 어구 로제타 마을에서 이집트 상형문자의 비밀을 푸는 열쇠인 ‘로제타스톤’을 발견한다.
모래더미에 묻혀 인류의 기억에서 증발해버린 이집트 문명이 마침내 그 꺼풀을 벗고 있었다. “그것은 인류가 두 번째 밀레니엄에 거둔 최고의 고고학적 성과였다.”
고고학의 어떤 분야도 이집트만큼 대중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미라(mirra)를 통해 ‘죽음’에 매혹됐으니!
프랑스의 이집트 원정은 명백한 문화적 약탈이었다.
명분은 그럴듯했다. 유럽의 문명을 ‘원래의 땅’ 이집트에 되돌려주기 위해서!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우월성을 확인하는 서구의 이데올로기일 뿐’.(에드워드 사이드)
하나, 혹자는 이리 말한다.
“보나파르트는 이집트에 대포와 인쇄기를 갖고 왔다. 그러나 대포는 떠났고 인쇄기만 남았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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