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마침내 정전협정이 체결된다.
3년의 전쟁을 끝내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1분. 거기엔 ‘어떠한 극적 요소도, 화해의 정신도 없었다’.
애초부터 이승만은 회담을 극력 반대했다. 그는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라며 단독 북진(北進)을 불사하겠다고 호언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소강국면에 접어든 전선을 들쑤셨다. 북한 해군의 취약점을 파고들어 서해5도 지역을 집중 공격한다.
그러나 미국은 달랐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선거에서 약속한 대로 ‘명예롭고 신속하게’ 전쟁을 끝내고자 했다. 확전은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당시 미국은 “한국군의 공격이 계속된다면 이승만을 축출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다”는 문제까지 거론하고 있었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북한 해군에 대한 한국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선을 그었다. 그게 바로 해마다 꽃게철이 되면 남북한 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는 그 ‘북방한계선(NLL)’이다.
1953년 4월 전쟁포로 문제에 대한 중국의 양보로 휴전이 기정사실화되자 이승만은 승부수를 던진다.
그해 6월 18일 새벽. 이승만은 유엔군사령부와 협의 없이 2만7000여명의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했다. 미국을 압박해 확고한 안보 공약을 받아내고자 함이었으나 정전체제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었다.
한미간의 갈등은 첨예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맹렬한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반공의 이해관계 속에서 그해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조인된다. ‘한미동맹’의 출발은 그러했다.
어쨌거나 정전협정은 ‘비극적이었고 상징적이었다’. 유엔군과 중국군, 북한군 대표는 서명했지만 북진통일을 주장했던 이승만은 빠졌으니. 한국의 운명은 다시 한번 한국인의 참여 없이 결정됐다.
“남한은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므로 대화를 할 수 없다”는 북한의 오랜 주장은 여기서 비롯된다. 하기야 전시작전통제권도 미국에 있다 하니!
이때부터 한반도는 남북문제가 북-미문제와 겹쳐지는 난해한 ‘이중성’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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