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정연욱/與野 핫라인은 어디가고…

  • 입력 2004년 7월 27일 18시 34분


1960년대 미국과 소련 간에 냉전이 한창일 때 양국 정상은 직통전화인 ‘핫라인’을 개설했다. 비록 적국(敵國)이지만 긴밀한 의사소통으로 우발적인 핵전쟁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포화가 쏟아지는 전쟁터에서도 교전국간에는 막후의 대화 채널을 확보하는 것이 상례다.

최근 국가 정체성 문제를 놓고 여권과 한나라당이 사활을 건 공방을 벌이는 바람에 양 진영을 연결하는 ‘핫라인’은 이미 끊어진 듯하다.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가 국가 정체성 문제를 거듭 문제 삼자 청와대는 26일 “유신독재의 잣대로 정체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반격했다.

이에 박 대표가 즉각 “헌법을 수호하지 않으면 정권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맞받아치자 열린우리당 김현미(金賢美) 대변인은 27일 브리핑에서 박 대표가 이사장으로 있는 정수장학회의 설립 과정을 문제 삼아 재반격에 나섰다.

양 진영이 매일 당직자회의에서 쏟아내는 말은 ‘전면전’ ‘독재자의 딸’ 등 험구로 가득하다. 살벌한 전의(戰意)만 번득일 뿐, 조금이라도 다른 편을 이해하려는 관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여야 수뇌부는 5월 3일 열린우리당 정동영(鄭東泳) 당시 의장과 한나라당 박 대표가 상생의 정치를 약속한 ‘여야 대표협약’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다.

미국과 소련의 ‘핫라인’은 냉전시대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데탕트를 연 계기가 됐다. 남북한도 지난달 4일 장성급 회담에서 서해안의 우발적인 함정 충돌을 막기 위해 ‘핫라인’ 개설에 합의했다. 비록 서해안 ‘핫라인’이 정상 가동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존재 자체가 국민들에게 주는 안정감은 무시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이런 점에서 여권과 한나라당은 전면전에만 골몰할 것이 아니라 실종된 ‘핫라인’부터 하루빨리 복원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꽉 막힌 정국이 풀리지 않으면 산적한 국정을 챙기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을까.

가뜩이나 경제가 어렵고 날씨까지 무더운 요즘, 국민들은 넌더리나는 정쟁(政爭) 대신 시원한 페어플레이가 펼쳐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정연욱 정치부기자 jyw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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