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화가 쏟아지는 전쟁터에서도 교전국간에는 막후의 대화 채널을 확보하는 것이 상례다.
최근 국가 정체성 문제를 놓고 여권과 한나라당이 사활을 건 공방을 벌이는 바람에 양 진영을 연결하는 ‘핫라인’은 이미 끊어진 듯하다.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가 국가 정체성 문제를 거듭 문제 삼자 청와대는 26일 “유신독재의 잣대로 정체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반격했다.
이에 박 대표가 즉각 “헌법을 수호하지 않으면 정권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맞받아치자 열린우리당 김현미(金賢美) 대변인은 27일 브리핑에서 박 대표가 이사장으로 있는 정수장학회의 설립 과정을 문제 삼아 재반격에 나섰다.
양 진영이 매일 당직자회의에서 쏟아내는 말은 ‘전면전’ ‘독재자의 딸’ 등 험구로 가득하다. 살벌한 전의(戰意)만 번득일 뿐, 조금이라도 다른 편을 이해하려는 관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여야 수뇌부는 5월 3일 열린우리당 정동영(鄭東泳) 당시 의장과 한나라당 박 대표가 상생의 정치를 약속한 ‘여야 대표협약’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다.
미국과 소련의 ‘핫라인’은 냉전시대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데탕트를 연 계기가 됐다. 남북한도 지난달 4일 장성급 회담에서 서해안의 우발적인 함정 충돌을 막기 위해 ‘핫라인’ 개설에 합의했다. 비록 서해안 ‘핫라인’이 정상 가동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존재 자체가 국민들에게 주는 안정감은 무시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이런 점에서 여권과 한나라당은 전면전에만 골몰할 것이 아니라 실종된 ‘핫라인’부터 하루빨리 복원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꽉 막힌 정국이 풀리지 않으면 산적한 국정을 챙기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을까.
가뜩이나 경제가 어렵고 날씨까지 무더운 요즘, 국민들은 넌더리나는 정쟁(政爭) 대신 시원한 페어플레이가 펼쳐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정연욱 정치부기자 jyw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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