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16>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7월 28일 18시 13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대쪽을 쪼개듯(1)

잔도(棧道)를 다시 얽으려고 식(蝕) 골짜기로 간 번쾌가 이끌던 군사를 모두 잃고 남정(南鄭)으로 돌아온 것은 한신과 다투다가 떠난 지 꼭 스무 날 만의 일이었다. 곁에서 수발들던 사졸 몇 명과 더불어 왕궁으로 든 번쾌는 먼저 한왕 유방을 찾아보고 죄를 빌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진작부터 들은 소리가 있어 한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너무도 정확하게 한신의 말이 들어맞자 놀라 물었다. 번쾌가 무안한지 그답지 않게 기어드는 목소리로 받았다.

“할 일은 많은데 받은 머릿수는 적고, 그나마 기일까지 촉박해 군사들을 조금 심하게 다그쳤더니 일이 이리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둘 몰래 동쪽으로 달아나기에 목을 잘라 겁을 주려 했으나, 오히려 그때부터 떼를 지어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감시하러 보낸 군사들까지 그들을 따라 달아나버려 끝내는 손발 같은 사졸 몇 명만 남고 말았습니다. 그때 마침 후대(後隊)를 보내셨기에 그들에게 잔도 닦는 일을 맡기고 저는 이렇게 죄를 빌러 돌아왔습니다.”

번쾌의 그 같은 말에 문득 느껴지는 일이 있어 한왕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군사를 부리는 일은 내 이미 대장군 한신에게 모든 걸 넘겼소. 장군은 내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대장군의 명을 어긴 것이니, 대장군을 찾아보고 군령을 받으시오.”

한신에게 그리 해달라고 당부를 받은 적은 없으나 왠지 그래야 될 것 같아 한 말이었다. 한왕이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번쾌의 얼굴이 굳어졌다. 떠날 때 한신과 다툰 일 때문인 듯했다. 한왕도 그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라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너는 젊은 시절부터의 벗일 뿐만 아니라, 사사롭게는 나와 동서간이 된다. 하지만 나는 이미 옛날 패현 저잣거리를 떠돌던 건달 유(劉)아무개가 아니고 너 또한 개백정 번쾌가 아니다. 나는 이제 한 나라의 왕이 되어 대장군을 세우고 그에게 군진(軍陣)의 일을 모두 맡겼으며, 너 또한 한 나라의 장수가 되어 그 군령 아래 서게 되었다. 지금 처지가 딱하게 된 것을 내 모르는 바 아니나, 이제 와서 너 하나를 보살피고자 대장군의 군권을 거둬들일 수는 없구나. 가서 대장군에게 죄를 빌고 군령을 바로 세우도록 하여라.”

인정어린 말이었지만 또한 그만큼 흔들림 없는 원칙을 앞세운 군주의 명이기도 했다. 번쾌도 그 말을 알아들었다. 먼저 한왕을 찾아보려고 마음먹을 때와는 달리 결연하게 일어섰다.

한달음에 한신을 찾아간 번쾌는 군례를 마치기 바쁘게 말했다.

“낭중 번쾌는 군무를 기일에 맞추지 못한 죄와 이끌고 간 군사를 모두 잃은 죄를 대장군에게 빌고자 왔소. 일전에 써두고 간 군령장이 있으니 대장군께서는 이 번쾌를 베어 군율(軍律)을 엄히 세우시오!”

그리고 털썩 무릎을 꿇으며 두 눈을 질끈 감는 품이 이미 군령에 모든 걸 맡긴 사람 같았다. 그러자 한신이 달려 나와 번쾌를 일으켜 세우면서 말하였다.

“번 장군은 스스로를 너무 낮추지 마시오. 장군은 죄를 지으신 게 아니라 우리 한군(漢軍)을 위해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신 거요.”

그 뜻밖의 말에 번쾌가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군령을 어기고, 군사들은 모두 잃었는데 대장군은 그 어인 말씀이시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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