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49m, 너비 45m!
그 거대함은 ‘나폴레옹 시대’의 웅장함으로 다가온다. 19세기 초기 세계강국으로서 마지막 전성기의 추억이기도 하다. 프랑스인들은 결코 나폴레옹을 잊지 못하니.
개선문은 아치 통로가 있는 기념비적 구조물을 뜻했으나 이 보통명사는 파리의 개선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파리의 복판인 샤를 드골 광장의 ‘궁륭(穹륭,)’에서 12갈래 방사선 대로를 굽어본다.
12개 도로는 나폴레옹 3세가 유럽의 12개 수도를 정복한 조부(祖父)의 위업을 기리고자 설계했다. ‘위대한 프랑스’가 유럽의 방석 위에 올라앉아 있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본떴으나 크기는 그 두 배다. 하기야 파리의 개선문을 흉내 낸 평양의 개선문은 이보다 11m나 더 높다고 하니.
바닥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무명용사의 묘가 설치돼 ‘영원한 불꽃’이 언제나 타오른다.
개선문은 1806년 나폴레옹 1세의 명으로 착공됐으나 그는 완공을 보지 못했다. 워털루 전쟁으로 몰락하는 바람에 개선문은 30년이 지난 뒤에야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세인트헬레나에서 쓸쓸히 죽어간 나폴레옹. 그의 묘비는 이름도 없이 단지 “여기에 눕다”라고 새겨졌다. 그는 유해(遺骸)가 되어서야 개선문을 지나쳤으니.
나폴레옹의 천재성과 영웅적 이미지에 가장 부합한다는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의 유해도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새웠다.
그러나 정작 이 문으로 화려하게 개선(凱旋)했던 군대는 보불전쟁에서 프랑스에 굴욕을 안긴 프러시아군이었다. 독일군은 2차 세계대전 때도 파리를 함락시키고 개선문을 통해 샹젤리제를 활보했다.
그 상처받은 자존심을 달래준 게 독일의 작가 레마르크다. 파리의 개선문을 문학사에 편입시켜 ‘불멸의 삶’을 선사했다.
‘세계고(世界苦)’를 앓았던 그의 소설 ‘개선문’은 전쟁으로 고립된 ‘거대한 감옥’ 유럽을 그리고 있다. 나치 수용소에서 탈출한 외과의사 라빅은 피란민 차량에 몸을 맡긴 채 멀거니 개선문을 바라본다.
“광장은 어둠에 잠겼다. 빛은 없었다. 거대한 개선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개선문의 찬란한 영광도 ‘역사의 어둠’을 어쩌지는 못했다.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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