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해 세상을 놀라게 했던 그가 프랑스 파리에서 맞은 33세 생일은 평생 잊혀지지 않는 악몽이었다.
1977년 7월 30일 윤씨 부부 납북(拉北) 미수사건이 발생했다. ‘유령의 인물’로 밝혀진 스위스 부호의 연주회 초청을 받고 유고로 들어갔다 납치 일보 직전에 극적으로 빠져나왔다.
윤씨는 “지금도 수상한 전화를 받거나 주변에 낯선 동양인이 서성거리면 가슴이 뛴다”고 말한다.
윤씨 부부를 ‘사지(死地)’로 이끈 사람은 고암 이응로 화백의 둘째 부인 박인경씨. 윤씨 부부는 고암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박씨를 어머니처럼 따르고 있었다.
당시 납치 미수사건에 ‘가담한’ 혐의를 받았던 박씨. 그는 진상조사를 위한 파리 주재 한국대사관의 소환에 불응하고 잠적했다. 대체 왜?
그리고 이 사건으로 한국 입국이 금지되자 1983년 한국 국적을 버렸다.
윤씨 부부 납치 미수사건은 꼭 그 10년 전 고암 부부가 고초를 겪었던 ‘동백림 사건’과 겹쳐진다. 고암은 윤씨 부부 납치사건에 대해 “한국 정부가 조작한 제2의 동백림 사건”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서독 등지의 한국인 교수와 유학생들을 대거 간첩혐의로 옭아맸던 ‘동백림 사건’은 1967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시절의 ‘작품’. 고암은 6·25전쟁 때 북으로 끌려간 아들을 만나고자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에 드나든 게 간첩죄의 ‘올가미’가 되었다.
독일 언론은 동백림 사건을 “스탈린주의적 정치 쇼”라고 비판했다.
수덕사 부근에 은둔해 말년을 보내고 싶어 했던 고암. 그의 꿈은 아내가 윤씨 부부 납치사건에 휘말리면서 깨지고 말았다. 그러나 박씨는 1994년 이래 한국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다.
그는 이때껏 납치사건에 대해 모호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나도 그 사건이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본인들만이 알 것이다!”
정말 그럴까. 이제는 밝힐 것은 밝히고 사과할 것은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윤씨 부부에게는 무슨 해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이념과 사상을 떠나 그게 인간에 대한 도리요,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사건은 이미 공소시효조차 지났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