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19>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8월 1일 18시 02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대쪽을 쪼개듯(4)

“뱀을 잡으려면 그 머리부터 쳐야 하지 않겠소? 우리가 길을 도는 사이에 폐구(廢丘)의 장함이 우리를 맞을 채비를 굳건히 할까 두렵구려.”

“그렇지 않습니다. 진창(陳倉)은 진나라 때부터 곡창(穀倉) 노릇을 해온 곳으로 함양 백만 인구가 먹을 곡식이 모두 거기에 갈무리 돼 있었습니다. 지금은 장함이 도읍으로 삼고 있는 폐구의 곡창으로 쓰고 있으니, 먼저 그곳부터 손에 넣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아군은 옹(雍)땅을 모두 평정할 때까지 군량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군민(軍民)을 먹일 곡식을 모두 잃은 폐구의 장함은 크게 낙담할 뿐만 아니라 성안에서 오래 버티지도 못할 것입니다.”

한신이 그렇게 말하여 한왕의 걱정을 풀어주었다. 하지만 때는 궂은비가 잦은 초가을 8월이었다. 대산관(大散關)에서 하룻밤을 쉬는 사이에 내리기 시작한 가을비는 다음날 날이 밝아도 그칠 줄 몰랐다.

한군(漢軍)은 하는 수 없이 하루를 대산관에서 더 쉬었으나 가을비는 그 다음 날도 멎지 않았다. 한신은 행군을 더 미룰 수 없어 빗속에 대군을 출발시켰다. 그런데 진창으로 가는 길이 또 말이 아니었다. 위수 강변의 황토는 이틀이나 내린 비로 곤죽이 되어 길을 덮고 있었다. 짐을 실은 수레바퀴는 길바닥에 박혀 움직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말조차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려웠다. 바닥이 질어 곤죽이 된 길을 진창길이라 하는데 속설(俗說)로는 그 말이 바로 그때 한군이 진창으로 가면서 지나야했던 그 길에서 나왔다고 한다.

한편 옹왕 장함은 갑자기 달려온 군사로부터 한군이 대산관을 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몹시 놀랐다.

“아니 잔도(棧道)를 통해 오고 있다던 한군이 어찌하여 대산관을 넘고 있다는 말이냐? 혹시 파촉(巴蜀)에서 밀고 드는 도둑 떼를 잘못 본 거 아니야?”

그러면서 두 번 세 번 그 군사에게 캐물었으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내 늙은 도적에게 속았구나! 파촉 한중에서 관중으로 들어오는 길이 어찌 잔도뿐이겠는가. 손발 같은 번쾌까지 식(蝕) 골짜기로 보내 수선을 떠는 바람에 깜박 우리의 눈과 귀가 가려지고 말았다. 대군이 아무 손실 없이 옛길을 지나 벌써 대산관에 이르렀다니 큰일이다….”

비로소 일이 엄중함을 깨달은 장함은 그렇게 한탄하며 앞뒤 없는 놀라움에서 깨어났다. 달리 믿을 만한 장수도 없어 스스로 적을 맞을 채비에 들어갔다.

진나라 땅에서 나고 자라 누구보다 그 지세를 잘 아는 장함이었다. 거기다가 기세 좋은 진승의 반란군을 희수(戱水)가의 한 싸움으로 기세를 꺾었을 뿐만 아니라, 함곡관을 나온 지 두 달도 안돼 그 수괴 진승까지 목 벤 진나라 제일의 명장이었다. 항왕에게 져서 항복한 뒤로 그 날카로움은 다소 무디어졌으나 아직도 옛 명장의 안목은 남아 있었다.

“우리가 성안 군사를 모두 이끌고 밤낮 없이 달려간다 해도 이미 대산관을 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이목을 온전히 식 골짜기로 끌어 모아 놓고 몰래 고도현을 통해 나올 정도의 지략을 가진 장수가 이끌고 있다면, 오랫동안 싸움 없이 보낸 대산관의 이름 없는 장수와 얼마 안 되는 군사가 무슨 수로 당해내겠느냐? 차분히 싸울 채비를 갖춰 진창으로 가자. 대군을 이끌고 진창성에 의지해 싸운다면 반드시 한군을 이기지 못할 것도 없다!”

장졸들에게 그렇게 영을 내리고 스스로 앞장서 진창으로 달려갔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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